두려웠다. 공감 용량이 두려웠다. “유가족이 여한이 남지 않게 하겠다. 언제든 찾아오라”며 대국민담화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흘린 악어의 눈물을 보면서 두려움이 앞섰다. 고아, 과부, 홀아비는 있어도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를 지칭하는 말은 없다고 하지 않는가? 창자를 끊어내는 아픔을 표현할 말이 없어서. 두 자식을 둔 아비로서 난 세월호 유가족의 그 고통을 몸과 마음에 얼마나 각인하고 공감하고 있는지 두려웠다. 진도 팽목항 경찰 라인 건너편에서 본 의경의 눈동자-마치 덫에 걸려 어찌할 바 모르는 어린 사슴의 눈동자 같았던 그 눈동자까지 함께 치유할 수 있을 것인지 두려웠다. 20년 넘게 노동운동을 하면서 수많은 열사와 산업재해 사망 등 안타까운 죽음에 익숙해져 버린 데서 오는 두려움이었다.



세월호가 삶의 일부인 사람들

 그래서 세월호 참사를 익숙한 죽음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익숙한 방식으로 넘어가는 건 아닐까? 그저 그 죽음을 신자유주의 구조적 문제로, 정부의 무능으로 진단한 채, 삶의 일부가 아니라. 몇 차례 집회와 서명으로 할 일 다 한 것처럼 당위적 활동에 머물까봐 두려웠다.

 밑바닥에서 꿈틀되는 그 두려움이 나를 걷게 했다. 세월호 유가족 십자가 순례단에 참여해 8월14일까지 18일 동안 함께 걸었다. 함께 걷는 동안 유가족의 고통과 아픔에 공감하고 성심을 다하는 많은 사람들은 만났다. 지원단은 식사 진원과 준비, 교통통제 등 필요한 것을 팔을 걷어 부치고 해결했다. 광주구간에서 700여 명이 넘는 순례 참가자들의 아침, 점심 식사를 반나절 만에 해결하는, 누구말대로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여준 광주 시민들의 힘도 접했다. `연대는 우산을 주는 것이 아니라 비를 맞으며 같이 걷는 것’이란 사실을 몸소 확인한 것이 내겐 두려움을 없애는 치유제가 됐다. 비록 대통령과 새누리당, 새정치연합이 유가족의 `기대’를 그때 그때 흔들 수는 있지만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려는 `희망’까지 꺾을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진실을 포기하지 않은 유가족들이 있고 유가족과 서로 다르지 않은 운명임을 자각하고 세월호가 삶의 일부인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게 `3년 상을 치르는 광주시민상주모임’이다. 매주 화, 수요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세월호 유가족을 맞이하며 진실마중길을 만들고 진실마중 나무를 세우는 사람들. 동네 곳곳에서 마을촛불을 켜고 구석구석에 있는 또 다른 세월호를 찾아 하나하나 바꿔 나가고 있는 사람들. 그들에게 세월호는 삶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5·18 광주민중항쟁이 끝내 진실을 밝힌 것처럼 5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15년이 걸리든 세월호의 진실은 밝혀낼 수 있다.” 세월호 십자가 순례 당시 아버님의 말씀이다. “굉장히 어린 10대, 20대 친구들이 세월호 특별법을 알았다는 사실은 내가 당장 싸우다가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30대, 40대가 됐을 때는 이 나라가 희망을 갖게 만들어. 희망, 정말 많은 이들이 깨어난 것 같아. 그러니까 제정될 때까지 싸워야지.” 46일간 단식투쟁을 한 유민아빠 김영오 씨가 미디어오늘과 인터뷰에서 밝힌 말씀이다.



함께 걷는 삶이 희망이다

 십자가 순례도 마쳤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던 프란체스코 교황도 돌아갔다. 김영오 씨 단식도 멈췄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끝났다’고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 세월호 진실을 밝히기 위한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동조단식이 계속 이어지고, 마을촛불이 확산되고, 거리와 광장을 함께 걸으며, 세월호를 삶의 일부로 공감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세월호의 진실은 끝내 밝혀질 것이다.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유가족이 원하는 세월호특별법을 “절대 안 된다”고 가로막고 유가족을 몰염치 범으로 몰아가고 있지만 우리가 함께 꿈꾸고 걸어가는 이상, 언젠가는 제정될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우리 삶이 곧 희망이기 때문이다.

권오산<금속노조 광주전남지부 정책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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