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그리스인 조르바’의 작가로 널리 알려진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생전에 마련해 놓은 자신의 묘비명에 새긴 유명한 글귀다. 언뜻 욕망의 배제로부터 자유의 탄생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 같지만, 짧은 행간의 의미망을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진정한 자유인은 어떤 두려움으로부터도 스스로 해방되는 존재여야 한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다.

 필자가 첫머리에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언급한 것은 최근 `카카오톡’에서 `텔레그램’으로의 `사이버 망명’과 관련하여 새삼스럽게 자유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어서다. 지극히 불온한 정권의 지극히 수상한 행동은 급기야 그토록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글로벌 국가’의 완결판으로 `사이버 망명’의 시대를 개창(?)했다. `군부독재’의 암울한 시기를 살았던 시민들이 언론의 자유는 물론 생각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토대적 자유까지 검열의 대상으로 삼으려 하는 현 정권의 행태에서 자유의 탄압에 기생하는 독재시대의 망령을 상기하는 것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떠올리는 것처럼 고통스런 일이다. 현대사의 암흑시대 - 민주주의의 공백기, 절대 권력은 시민의 존재의 세계뿐만 아니라 사유의 세계까지 모조리 전유(專有)하고 싶어 안달이었다. `문제아’로 낙인찍히는 순간, 사적 존재로서의 삶은 모조리 강탈당했다. 개인 간의 은밀하고 중요한 소통수단이었던 편지는 물론 개인 사생활의 티끌 한 점까지 샅샅이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개인의 사적 삶은 `절대무(絶大無)’로 환원되었다.



자유 탄압에 기생한 독재시대 망령

 이제 `독재’로 규정되었던 암울한 시대의 고통스런 잔상이 유령처럼 우리 삶의 전면으로 다시 부상하는 무엇 때문일까? 이 시대의 `사이버 망명’은 고통스런 역사의 깊은 상처를 분노의 감정과 짝지어 다시 상기시킨다. 선조들의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속언이 있다. 말의 속내는 자연세계의 인과관계의 필연성에 대한 독단적 신념을 우려한 것이지만, 삶의 과정에서 그런 인과관계의 사슬에 빠지지 않도록 경계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다. 그렇다. 현 정권은 이 속담을 인과관계의 사슬에 얽히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구로 읽어야 했다. 대통령의 사생활(?)과 관련된 말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이러쿵저러쿵’ 사람들의 입에 `자유’롭게 회자되자, 권력은 어김없이 불온한 본성을 드러냈다. 산케이 신문 기자의 구속이 언론의 자유를 겁박하는 신호였다면, `카카오톡’ 검열로부터 시작된 사이버공간에 대한 전면 감시는 시민의 표현의 자유, 생각의 자유까지 통제하겠다는 전제적 발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이다. 까마귀가 날아오르는 것과 배가 떨어지는 것이 인과관계가 없다고 강변한들 누가 믿겠는가? 우연적 관계일 수도 있었던 사실의 세계가 반복해서 나타난다면 그것은 신뢰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법칙이 된다. 독재시대에 죄 없는 수많은 시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권력의 행태가 이 시대에 고스란히 재현된다면, 경험으로 검증된 법칙을 받아들이듯이 독재시대로의 회귀를 두려워하여 저항하는 것은 시민의 정당한 행위가 아니겠는가? `사이버 망명’은 최소한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몸짓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이버 공간을 유대감에서 비롯되는 친밀함, 심원함, 영속성이 상처를 받는 피상적 만남의 공간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사이버 공간’은 피상적이고 제한적이긴 하지만 사람과 사람이 경계화(境界化) 된 가시적 공간을 넘어 자유롭게 소통하고 교류하는 곳이다. 페터 한트케가 아주 적절하게 말한 것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 그것으로 살아간다.” 낯섦을 받아들이고 익숙해짐을 전제한 소통이 사이버 공간의 본질이라면, 시민 개개인의 도덕적 자율성에 대한 신뢰는 사이버 공간을 건강하게 지탱하는 지주(支柱)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사이버 세계가 지배하는 우리 삶의 단면을 비판적으로 해부하여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 한다’는 존재증명의 명제는 이제 `나는 보여진다. 따라서 나는 존재 한다’에 밀려 삶의 저편으로 아스라이 사라진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면 사이버 공간에 대한 검열은 이 사회가 자유의 약탈로 규정되는 검열사회라는 점을 명시적으로 드러낸 것이며, 이는 사적 존재의 절멸(絶滅)을 의미하는 “나는 보여진다. 따라서 나는 사라진다”는 명제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나는 보여진다. 따라서 사라진다”

 우리는 `보는 자’이며 동시에 `보이는 자’다. 따라서 볼 수 있다는 것이 권력의 표상이라면 우리는 권력의 위와 아래를 동시에 겸하고 있는 자다. 그런데 `보는 자’와 `보이는 자’ 사이에는 확연하게 층차화(層次化) 된 권력의 서열관계가 상존한다. 특히 권력의 상층에 자리하여 `보는 자’는 볼 수 있는 권력을 전가의 보도로 삼아 `보이는 자’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낱낱이 훑어본다. 여기서 `본다는 것’, `볼 수 있다는 것’은 보이는 자의 삶을 사유화하겠다는 권력의 의지로 작동한다. 절대 권력의 `보는 자’들이 `카카오 톡’을 비롯한 사이버 공간을 수시로 넘나들며 훔쳐보고 검열했다면, 이는 우리 사회의 절대권력이 중층화(重層化) 된 관음사회(觀淫社會)의 정점에 서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한병철은 `투명사회’에서 “디지털 통제사회는 자유를 빨아먹고 산다”고 정확하게 지적했다. 오늘날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있는 `사이버 검열’이 자유를 흡혈(吸血)하여 존재하는 나쁜 권력의 부끄러운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 정권은 `투명한 사회’의 본질을 들먹이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투명사회에 대한 희구와 요청은 무엇보다 `공적 사회’에 국한돼야 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동안 온전히 공적인 존재다. 반면 시민의 삶은 은밀하게 감춰지고 온전히 그리고 마땅히 보호되어야 할 사적인 세계다. 절대 권력의 `보는 자’가 `보이는 자’의 사사로운 삶의 세계를 전단(專斷)하고 전횡(專橫)하는 그 곳은 개인이 죽은 사회, 자유를 종언하는 사회다.

 이제 사이버 망명을 찬양하며 “나는 자유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장복동<전남대학교 철학과 강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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