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존 듀이에 따르면 예술은 일상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다. 둘 사이의 구별이 있다면 우연히 마주한 사건들을 하나의 통일된 흐름 속에서 파악하는 일상적 경험이 예술에서 보다 더 심화된다는 점뿐이다. 다시 말해 예술은 심화된 일상적 경험을 의미한다.

 우리에게는 사뭇 낯선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예술과 일상은 서로 다른 것처럼 여겨졌으니까. 쉽게 말해 일상은 평범한 것이고, 예술은 특별한 것이었으니까. 오늘날 예술이 그토록 예술과 일상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애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예술을 대중적으로 만들려는 이러한 노력은 특히 다수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화된 예술에서 두드러진다.

 얼핏 보면 대중들에게 예술을 친숙하게 만들려는 이러한 시도는 듀이가 말했던 예술과 일상의 동일성을 회복하는 작업처럼 보인다. 얼핏 보면 말이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시도는 오히려 예술과 일상을 단절시키고, 심지어 예술 자체의 존속을 위협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예술은 일상과 다르지 않다고? 

 우리는 이 과정을 대중화된 예술의 깃발 아래 결집된 일련의 예술가들이 추구하는 일명 대중적인(popular) 예술 행위에서 자세히 엿볼 수 있다. 이들은 예술의 일상화를 위해 매우 직접적인 방식으로 일상과 예술을 연결하며, 둘 사이에 ‘소통’을 추구한다. 이들이 선택한 교두보는 일상의 직접적인 경험인데, 그 경험은 바로 ‘재미’이다. ‘재미’라는 일상적 경험을 토대로 형성된 예술의 형식은 이름하야 “놀이로서 예술”이다. 철학자 쉴러는 놀이를 어떤 강제된 목적도 없이 순수한 재미를 자율적으로 추구하는 가운데 자유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행위로 정의하는데,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이들 예술가들의 예술적 놀이는 어느 정도 일반적 놀이와 구별되는 맥락을 가진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일명 포스트모던한 예술가들의 예술적인 놀이는 그 예술적 형식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일상 속 놀이로 끝나고 만다. 이들은 일상 속 클럽에서 쏘아대는 것과 동일한 레이저빔을 예술적으로 쏘아대면서 여기에 예술의 이름을 붙이려 시도하지만 클럽의 일상을 차용한 예술 현장에는 여전히 일상 속 클럽의 경험이 재현돼 있을 뿐이다.

 포스트모던한 예술가들이 앞장선 예술 대중화의 결과는 대중이 손쉽게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넘게 만들었고, 대중이 너무나도 친숙한 방식, 바로 일상적인 방식으로 예술을 대하도록 만들었다. 이와 더불어 예술적 경험의 특별함은 사라지고 진짜 일상으로 전락했다. 예술과 일상의 허물어진 경계 너머에서 대중들이 경험한 것은 일상 여기저기에서 엿보이는 예술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 속 “예술의 부재”였다.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예술이 허물어진 경계 너머로 물밀 듯 밀려오는 일상에 완전히 잠식당한 것이다. 놀이로서 예술은 사라지고 진짜 놀이만 남고 말았다.

 

일상속 ‘예술의 부재’ 역효과 

 예술의 몰락을 가져온 예술 대중화, 이것이 바로 문화수도를 꿈꾸는 광주의 2014년을 휩쓸고 있는 사업화된 예술들의 또 다른 얼굴이다. 문화로서 예술이란 표어 아래 기꺼이 놀이로서 예술이 여기저기에서 모두가 쉽고 즐겁게 공유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행된다. 예술이 얼마나 쉽고, 일상적이라고 생각하는지 심지어 시장에서 장 보고, 야식 먹고, 나들이 하면서 흘깃 보는 것만으로도 예술을 공감하고 느낄 수 있다고 여길 정도다. 심지어 너무나도 친숙한 보고, 즐기고, 먹고, 마시는 일상적인 소비문화를 예술이 그대로 재현해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정도다.

 사업화된 예술의 자본주의적 민낯은 포스트모던한 예술가들에게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스스로 예술의 이름마저 구속으로 느끼며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었던, 그리고 그런 자유를 전개한다고 믿었던 이들의 영 어긋나버린 결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철학자 허버트 마르쿠제의 말을 떠올리자. 그는 쉴러의 놀이로서 예술에서 진정한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조건을 바로 현실을 지배하는 원칙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지적한다. 일명 놀이로서 예술을 통해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려던 포스트모던한 예술가들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직접적으로 자유로운 놀이가 아니라 오히려 이 놀이가 진행되는 현실을 지배하는 원칙에 대한 고려였다.

 그러나 이 예술가들은 예술의 일상화, 말 그대로 놀이로서 예술을 전개하는 가운데 이런 문제를 너무나 간단히 초월해버렸다. 비록 이들이 쉽게 외면하고 회피했지만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오늘날 현실을 여전히 지배하는 원칙의 이름은 바로 ‘돈’의 원칙, 일명 자본주의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문제를 의식하지 않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암묵적인 자본주의 원칙의 수용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이들 예술가가 추구한 자유가 실은 자본주의적 자유였으며, 이들이 매진한 예술의 일상화 역시 실은 예술의 자본주의적 일상화였던 것이다.

 자본주의적 일상은 쉽게 말하자면 돈을 벌고, 돈을 쓰는 일상이다. 그러나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주의적 일상은 모두 돈을 벌기 위한 일상이다. 왜냐하면 돈을 쓰는 일상, 일명 여가는 주로 고된 노동에 지친 스스로를 위로하며 노동을 준비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더 즐겁게 여가를 보낸 사람이 더 기꺼이 고된 노동에 임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일상이 지속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잘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잘 쉬는 것이다.

 

사라진 예술의 ‘특별함’ 되찾자 

 지배적인 현실 원칙의 거절을 거절한 사업화된 예술은 오히려 이 지배적인 현실 원칙에 복무한다. 이와 더불어 예술은 잘 쉬기 위한 일종의 여가 대상으로 전락하고, 자본주의 일상의 프로파간다로서 활용된다. 프로파간다의 명제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어느 광고 문구를 따라서 “열심히 일한 당신 더 즐기라!” 쯤이 된다. 일상적 놀이 문화가 된 예술에 동원된 대중들은 차츰 순응적이 되어 가는데, 그 이유는 놀이의 즐거움이 오직 놀이 주체를 향한 그들 자신의 자발적인 봉사와 예속의 결과로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예술의 사업화는 일명 “영구적인 동원 상태”의 대중이라는 괴물, 즉 자본주의적 일상이 주는 재미를 만끽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유마저 포기하는 인간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사라진 예술적 경험의 특별함을 일상에서 되찾아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오늘날 예술은 자본에 은폐된 일상과 그 너머로 몰락한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그 어느 때 보다 더 진지해져야 한다. 오직 이러한 예술만이 언제든 손쉽게 일상을 침식하는 지배적인 자본 질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진정 자유로운 예술은 자유로운 일상으로 이어지고 바로 여기에서부터 진짜 놀이가 시작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진짜 놀이와 더불어 비로소 잃어버린 일상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다.

박현진<대안공간RGA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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