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노 치츠코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라는 책에서 ‘남성의 여성 혐오는 타자에 대한 차별인 동시에 모멸이다. 남성은 여성이 될 걱정이 없기 때문에 안심하고 여성을 타자화하고 차별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여성에게 있어 여성혐오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된다. 자기 혐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어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적고 있다.

 여성 혐오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사회 곳곳에 존재하고 있었던 성별 체계로 내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도 내 일상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여성’이라는 범주에 ‘여성’으로 속해지면서 동시에 여성이라는 범주가 짊어진 역사적 여성혐오의 모든 것과 맞닥뜨리게 된다.

 여성들은 범주가 부여하는 지정석에 안주할 것인가, 그 지정석에 적응하지 않을 것인가에 대한 선택을 하게 된다. 그 지정석에 안주하지 않겠다는 선택은 우리 사회의 견고한 성별 체계에 균열을 내는 일이고 여성혐오와의 갈등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는 내가 여자라고 하는 사실에 얽매여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나는 여성 혐오와의 대결을 줄곧 피해왔다’는 의미라고 다시 책에서 적고 있다.

 지난 7월 1일~7일까지는 양성평등기본법에서 정한 ‘양성평등주간’이었다. 주간을 맞아 각 지자체마다 치러진 행사는 다양했고 많은 여성과 남성들이 그 행사에 초대되었다. 궁금한 것은 “그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 중 몇명이나 모멸과 차별 범주에 속한 ‘여성’에 대한 자각이 있었을까?”였다.

 무대 위에 올라 축하 인사를 했던 (남성)고위 인사들은 어김없이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사람은 집사람’이라는 말을 들먹이며 자신이 양성평등 의식이 있는 사람임을 내심 강조한다. 내가 듣기엔 진짜로 무서워하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 말은 여전히 주도권은 본인에게 있지만 ‘여자에게 이겨봤자’니 그냥 ‘져주고’ 있는 걸로 이해되고 있는 데도 말이다. 여성이 되어보지 않은 남성들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반대로 여성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남편’이라고 했을 때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까?

 양성평등은 ‘여성과 남성 간의 평등’이라기보다는 ‘여성과 남성의 평등’이다. 단순히 여성과 남성 간에 어떤 몫을 평등하게 나누는 것으로 충분한 문제가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 각각 자유로운 주체로서 서로 평등하게 배려되고 존중받았을 때 가능하다.

 ‘내가 여자라고 해서 차별을 당해본 적이 없다’는 말이나 ‘지금은 여자들이 더 파워가 있다’는 논리는 사회적 약자에게 강제된 범주를 받아들이게 하는 논리와 다름없다.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강제’된 여성의 범주를 ‘선택’으로 바꿀 수 있을 때 가능한 것이고 이것은 이제까지 지켜온 성별 지배질서를 깨는 악의 선택이 될 수 있다.

백희정<광주전남여성단체연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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