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명의 조선시대 왕들 중 신하들에 의해 쫓겨난 이는 2명,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폭군’ 연산군의 폐위를 두둔할 맘은 없으나, ‘폐모살제’ 혐의로 쫓겨난 광해군의 폐출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음이 솔직한 심정이다.

 연산군의 폭정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생모(폐비 윤씨)의 죽음에 관련됐다는 이유로 아버지(성종) 후궁들을 때려 죽인 패륜이 대표적이다. 웃었다고 죽이고, 울었다고 죽이고, 술잔을 엎질렀다고 죽인 신하들이 부지기수였다. 팔도에서 뽑아온 미녀 1000여 명을 ‘흥청’을 만들어 관리하며 향락에 빠져 정사를 멀리했으니 ‘흥청망청’이라는 고사성어가 예서 유래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광해군은 달랐다. 임진왜란때 아버지(선조)는 개성-평양-의주까지 도망에 바빴지만, 세자였던 광해는 분조(조정을 둘러 나눔)를 이끌며 백성을 위무하고, 의병을 독려하는 등 실질적인 군주 역할을 했다. 하지만 후궁 소생이라는 태생적 한계에 늘 불안해했다. 결국 아버지(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하려했고, 인목대비의 아들이자 자신의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패륜’이 반정의 빌미를 제공했다. 하지만 이는 명목이었을 뿐. 반정의 결정적 배경은 광해의 중립외교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연산군·광해군, 다른 의미의 반정

 쇠퇴하는 명나라와 부상하는 후금(후일 청나라)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쳤던 광해를 신하들은 ‘배은망덕’이라고 직격했다. 한족 외 민족을 오랑캐(만주족·후금)라며 배척한 중화사상에 사로잡힌 신하들은 죽어도 명에 대한 의리를 버려선 안된다며 광해의 실리외교와 정면 충돌했다. 광해의 중립외교의 진면목은 후금(후일 청나라)과 전쟁을 위해 명이 요청한 원병 파견에서 드러난다. 파견군 장수 강홍립에게 광해가 준 밀지는 ‘대충 싸워라’였다. 명의 요구도 수용하고, 청나라와도 척을 지지 않으려는 전략이었다. 신하들은 결국 광해를 몰아내 중립외교 폐기, 친명배금을 노골화했다. 그 대가는 인조때 두 번의 호란(정묘·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백성들의 몫이 됐다. 국토가 유린되고, 수많은 백성·여성들이 청나라에 노예로 끌려가 고통을 당한 것이다.

 쫓겨난 왕들은 최후에서도 대비된다. 권좌에 있을 때 향락에 빠져살았던 연산은 유배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폐위 3개월만에 죽고 말았다. 광해는 달랐다. 강화도와 제주도로 유배지를 전전하면서도 18년을 더 살았다. 타고난 기질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어쩌면 다시 복위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왕조시대를 지나 공화국 대한민국에서도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 2명이 탄핵 심판대에 섰거나 설 예정이다.

 2004년 ‘선거법 위반’ 혐의로 국회에서 탄핵 발의된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10여년 뒤 ‘국정 농단’ 사태로 박근혜 대통령이 다시 탄핵에 직면한 것이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은 헌법재판소에서 부결돼 그는 임기를 다 마치는 것으로 사태가 정리됐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 국회 표결은 9일 진행될 예정이고, 국회에서 의결되면 그 즉시 직무가 정지되고 헌법재판소 심판을 기다려야 한다. 장담할 순 없지만 박 대통령은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돼 임기를 못채우고 물러날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많다.

 몇해년 개봉된 영화 ‘광해’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오버랩된다는 평이 있었다. 가짜 광해 하선이 사회 밑바닥에서 출발해 왕이 된다는 설정, 공물과 공녀 등 명나라의 부당한 요구를 들어주자는 신하들을 호통치는 장면이 이같은 평가의 근거로 제시됐다. 시대를 앞선 통찰력을 지녔으나, 그래서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지도자란 점에서도 두 사람은 일맥 상통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박정희 시대 종언, 그의 딸이 제물로!

 반면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 사유는 개인적 자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어서, 연산의 운명과 닮았다는 느낌이다. 연산군의 폐위에 반대하는 신하는 없었다. 연산 치하에서 부역했던 유자광 같은 인물도 어느새 노선을 갈아타 반정에 가담해 공신이 됐을 정도다. 연산이 폐위된 날 백성들은 도성 거리로 몰려나와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지도자의 퇴장은 특정인의 존재감 소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의 철학으로 이끌어온 국정 패러다임 변화와 시대의 변혁으로 이해한다는 거다. 게다가 박 대통령의 퇴진은 지금껏 대한민국을 짓눌러온 그의 아버지 박정희 시대의 종언과도 맞물릴 것이어서 의미가 간단치 않다. 산업화를 앞세워 민주화를 억눌렀고, 반공이데올로기로 분단을 고착화시켰으며, 권위주의로 민의를 뭉갠 시대…. 대한민국 현대사를 짓눌러온 박정희의 유산이, 이를 승계한 자녀의 무능함으로 더 이상의 가치를 주장하기 어렵게 된 것이다. 박정희 시대를 마감하는데 그의 딸이 제물이 됐으니, 결자해지랄까?

 자격을 잃은 왕은 쫓겨나고, 시대에 뒤떨어진 패러다임은 종언을 고하고, 백성들은 만세를 불러야 하리라. 12월9일, 국회를 주목한다.

채정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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