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까뮈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원한과 반항의 차이를 말하였다. 원한은 자신이 가지고자 했던 것들을 얻지 못하여 발생한 분노와 질투가 외부로 발산되지 못하고 내부에 쌓여 생긴 것이다. 마치 ‘밀폐된 병 속에서 무력감이 계속됨으로써 생겨나는 불건전한 분비물이며, 욕망과 소유에 몰두하게 하는 심리에 있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한다. 원한은 타인에 대한 시기로 나타나며 타인으로부터 자기가 얻지 못했던 것들을 쟁취하거나 파괴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강자의 마음속에서 자라나면 출세욕이 되기도 하고, 약자의 마음속에서 자라나면 독살스러움이 되기도 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드러난다. 결국 원한은 상대가 느꼈으면 하고 바라는 어떤 고통을 생각하며 미리 즐거워하는 것이다.

 반면 반항은 인간으로서 지키고자 했던 것들,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것들을 침해당하였을 때 나타나는 분노이다. 개인적인 권리를 지키기 위한 것에서 시작되고 실천되는 것이나 결코 개인만을 위한 이기적 행동이 아닌 ‘우리’를 위한 것이 된다.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존재라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무릎 꿇느니 죽기를 각오하는 것이 된다. 그것은 전염된다. 한 명의 페스트 환자가 순식간에 온 도시를 감염시키듯, 피억압자 한 명 뿐만 아니라 억압의 모습을 보는 목격자에게로 저항은 ‘동일화’감정을 통해 저항은 전파된다. 러시아 테러리스트들 가운데서, 감옥에서 동지들이 혹독한 매질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항의의 표시로 자살한 사건들이 이를 말해준다.



원한이 아닌 저항의 광장

 이러한 저항은 청년 전태일의 분신을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소시민 청년 전태일이 함께 알고 지내던 여공들의 근무조건을 위해 몸을 불살랐던 지극히 개인적인 투쟁이 결코 개인적인 투쟁으로만 해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키고자 하는 것보다 큰 희생을 감내하는 전태일의 행동은 자신이 친하게 지내던 여공 친구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소박한 투쟁의 모습을 띄었으면서도 동시에 자본 축적의 도구로 전락해가는 인간존엄을 지키기 위한 우리 모두의 투쟁이 되었다. 바로 이 투쟁이 자신이 얻지 못한 것을 가진 존재들에 대한 시기와 분노로서 원한이 아닌 ‘따로 또 함께’의 저항인 것이다. 까뮈는 ‘나는 반항한다. 우리는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2016년 11월부터 불타오른 촛불광장은 ‘원한’이 아닌 ‘저항’의 목소리로 가득 찼다. 시민들은 천하제일깃발대회를 열었다. 1%의 기득권층을 향해 깃발을 들어 저항해온 기성 자율결사체들을 향해 광장에 모인 시민대중은 ‘깃발 내려’를 외치지 않았다. 여전히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에서처럼 민주노총, 전교조, 참여연대 등 기성 자율결사체들의 목소리에는 그들의 이익과 맞닿아 있고, 그들의 처지와 입장이 아니라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향해 깃발 내리라는 원망과 배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며, 들리다가도 금방 사그라졌다. 조중동 종편을 비롯한 수구기득권 언론들이 광장에 모인 시민들을 분열시키고 정권교체 전선을 교란시키고자 광장에 나온 깃발들 중 약한 고리라 생각되는 부분들을 파고들었다. 특히 한상균·이석기 석방 등 광장에 모인 일부 깃발(자율결사체)들의 목소리를 크게 부각시켜 ‘종북 빨갱이’라는 색깔론에 휘둘린 촛불집회 프레임을 광장에 덧씌우고자 하였으나 여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 2008광우병 촛불집회 ‘깃발 내려’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그것은 반항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광장촛불의 진화이다.



존재의 가치에 대한 모두의 투쟁

 광장에 모인 촛불시민은 누군가에게 깃발을 내리라고 하기 전에 자신들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자본의 논리로 환원되어 왔던 가치들을 지키고자 하는 자신만의 깃발을 들었다. 광장을 다양한 깃발들로 가득 채우며 천하제일깃발대회라는 풍자와 해악 그리고 저항담론이 넘치는 축제의 장으로 변화시켰다. 기성자율결사체들의 깃발을 분리하고 배제하는 대신 수많은 촛불시민 중 한 사람, 1/n의 목소리로 만들었고 동시에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다. 광장을 모든 저항의 목소리가 자유롭게 소통될 수 있는 곳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광장에 펼쳐진 촛불 무대 위에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피해 받고 억압받았던 경험(알바 경험, 구직 경험, 불우한 가정형편 등)을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그 무엇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존재의 가치에 대한 저항으로서 우리 모두를 위한 투쟁사가 되었다.

 촛불시민은 원한이 아닌 반항을 자각하고 실천하고 있으며, 기성자율결사체들에게는 플랫폼 역할이 요구되고 있다. 시민들은 미선이·효순이 촛불집회 당시 ‘FUCKING USA’ 노래에 대한 다른 생각을 떠올리지 못하던 광장에서 DJ DOC의 ‘수취인분명’에 대한 페미니즘적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중요하게 토론되는 광장으로 진화시켰다. 나아가 정권교체와 제7공화국을 꿈꾸며 기성자율결사체들과 정치인들을 광장으로 소환하고자 한다. ‘개혁입법을 위한 토론대회’, ‘박근혜 정권 적폐청산을 위한 다양한 토론장 형성’ 등이 그러한 몸짓들이다. 이제 기성정치인들과 행정관료, 기성자율결사체들은 이러한 시민들의 저항에 대한 자각과 실천에 주목하며 자신들의 목소리가 아닌 시민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 플랫폼을 고민해가야 할 것이다.

김동혁<전교조 광주지부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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