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비정해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한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자신의 이익보다 전체의 삶을 겨냥한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은 하나같이 아팠다. 그의 이름을 기억할 사람이 있을지나 모르겠다. 장태완 장군, 그가 세상을 떠났다. 한은 이제 무덤 아래 누웠다.

 그가 누구던가? 1979년 12월12일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킨다. 그날 밤 10시, 이미 대세는 기운 다음이었다. 신군부는 장태완 장군에게 전화를 건다. 함께 일하자는 회유 전화였다. 그는 거절했고, 진압에 나섰다. 그에게 남은 길은 실패한 진압의 굴레였다. 그는 곧바로 강제 예편됐고, 24평 집에 가택연금 당했다. 그의 부친은 그 날로 곡기를 끊고, 몇 달 후 눈을 감았다. 부친의 유언은 이러했다. `예부터 역모자들 손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먼저 가야지.’

 그의 삶은 많이 고독했다. 가택연금의 시절에 그가 걸었던 미래는 아들이었다. 그의 아들은 1981년 서울대 자연대 수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하나뿐이었던 아들은 1982년 1월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반면 역모자들과 손을 맞잡았던 `하나회’들은 지금까지도 잘 먹고 잘 산다. 여전히 막강한 힘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곳의 수장이었던 사람은 전 재산 29만 원으로도 거칠 것 없이 산다. 그러나 중요하지 않다. 어차피 한 번 살고 끝나는 게 사람의 시간이다. 남는 건 기억이다. 장태완을 사람들은 이렇게 기억한다. `장포스’, 그 기억 하나만으로도 그의 선택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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