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수라는 불세출의 야구스타가 있다. 그를 빼놓고는 30주년을 맞은 한국 프로야구를 얘기할 수 없다. 82년 역사적인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1호 홈런을 때려냈고 83년부터 내리 3년간 홈런왕, 84년엔 ‘타율-홈런-타점’ 왕을 한꺼번에 거머쥔 ‘트리플크라운’의 역사를 쓴 이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지도자 수업을 쌓은 그는 지난 2007년 국내로 돌아와 SK 와이번스에서 코치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다.

 2007년 5월26일 인천 문학야구장. 그 이만수 코치가 3만 관중 앞에서 팬티만 입고 운동장을 한 바퀴 돌았다. 왜 그랬을까? 약속 때문이었다. 인천 문학구장이 시설은 좋은 반면 관중이 적은 사실을 개탄한 그가 야구장이 만원사례를 이루면 팬티만 입고 그라운드에 나오겠다고 약속했고, 그날 실제 만원관중이 입장하자 그 약속을 지켰던 것. 사람들에게 ‘약속’의 의미를 일깨워준 퍼포먼스였다. 나이 쉰이 넘은 왕년의 대스타가 까마득한 후배들, 그리고 3만 관중, TV를 보고 있을 수많은 시청자 앞에서 그같은 수치스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 하지만 그는 자신을 발가벗겨서라도 팬들에게 한 약속을 지켰다. 대한민국의 한 남자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마음을 뜨겁게 만들 수 있는가를 보여준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그는 당시 “팬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옷도 벗고 자존심도 벗었다. 약속을 지켜 너무 기쁘다. 팬들이 없다면 프로야구의 존재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 얼마나 속 깊은 철학인가?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에는 미생(尾生)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평소 신의가 두터워 한 번 한 약속은 어떤 일이 있어도 꼭 지키는 것을 신념처럼 여기고 살았던 이다. 어느날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한데 여자는 나타나지 않고 비가 내렸다. 비는 계속 내려 물이 차올랐으나 그는 끝내 자리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가 마침내 교각을 끌어안고 죽고 말았다.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는 고사성어 ‘미생지신(尾生之信)’ 이야기이다.

 역시 중국 고전 한비자에 나오는 ‘증자의 돼지’ 이야기도 ‘약속’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다. 공자의 제자 중에 증자(曾子)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그의 아내가 시장에 가려는데 아이가 울면서 따라나오자, 아내는 “시장에 다녀와서 돼지를 잡아 요리를 해 줄게”라고 약속을 하고는 시장에 다녀왔다. 와서 보니 증자가 정말로 돼지를 잡고 있었다. 화들짝 놀란 아내가 “아이를 달래기 위해 둘러댄 말인데 정말로 돼지를 잡으면 어떻게 하냐”고 따져 묻자, 증자는 “아이에게 속임수를 가르쳐선 안된다.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한다”며 돼지를 잡아 아이에게 먹였다. 아무리 사소한 약속이라도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신뢰’의 가르침을 역설하는 고사(故事)이다.

 위의 세 가지 사례와 요즘의 우리 사회가 너무나 비교된다. 특히나 지도층 인사, 그 중에서 정치인들의 약속이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을까를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우리 정치인들, 선거 때만 되면 온갖 ‘사탕발림’으로 유권자들에게 한 표를 호소한다. 이름하여 공약이다. 무슨 공장을 세우겠다, 기업을 유치하겠다, 학교를 짓겠다, 뉴타운 개발하겠다 등…. 표만 얻어올 수 있다면 못할 말이 없다. 하지만 어디 들어갈 때 마음 하고 나올 때 마음 다르더라고, 선거만 끝나면 “내가 언제 그런 말 했더라” 식이다. 180도 말이 바뀐다. 그야말로 그 수많은 공약들은 ‘빌 공’자 공약(空約)이 되고 만다. 유권자들 허망하기가 이를 데 없다.

 요즘 이명박 대통령의 ‘공약(空約)’ 때문에 국민들이 힘들다. 2007년 대통령선거 당시 약속했던 세종시 원안추진은 선거가 끝나자 말이 바뀌어 수정안을 밀어붙이려다, 자신이 속한 여당 내에서조차 지지를 못 받아 결국 국회에서 원안추진으로 결론이 났다. ‘과학비즈니스 벨트’나 ‘동남권 신공항 건설’도 마찬가지다. 선거 때 목이 쉬도록 약속했던 것인데, 이제 와서 없었던 일이 돼버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민에게 한 약속을 이처럼 쉽게 깨트릴 수 있는 것인지….” 만나는 사람마다 탄식이 터져나온다. 말 그대로 ‘신뢰 상실의 시대’이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 것이 걱정이다. 초등학생들에게 “약속이 무슨 말이냐”고 물으면 “깨는 것이요” 하고 대답할까 두렵다.

오일종<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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