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 빈 뜨락에 혼자 있는 그대/ 크고 작도, 늙도 젊도 않게/ 속 쓰리지도 않게/ 뒤로 돌아가 보아도 어디 따라 감춘 열(熱)도 없이/ 눈비 속에서 잊힌 듯 숨쉬고 있다/ 그 들숨 날숨 안에 들면 사는 일이 온통 성겨진다.// ‘춥니?’/ ‘아니.’/ ‘발끝까지 젖었는데?’/ ‘어깨가 벌써 마르고 있어.’/ ‘조금 전에 우는 걸 봤다는 사람이 있는데?’/ ‘네 눈으로 직접 본 거나 옮기지.’>

 -황동규, ‘그날, 정림사지 5층 석탑’

 

 그 탑을 처음 봤을 때, 그 느낌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열망과 슬픔이 한 덩어리로 돌 안에 뭉쳐 있는 것 같았다. 1500년 동안 입을 다문 슬픔은 기어이 세상 밖으로 내놓을 수 없는 것이어서 정림사지 5층 석탑은 끝내 침묵할 것처럼 보였다. 의자왕이 지금껏 살아있다면 세상에 대고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백제를 멸망시킨 당의 장수 소정방은 그 탑에 평정의 기쁨을 문자로 새겨 넣었다. 1500년 동안 탑은 그 처연한 상처를 몸에 새기고 있다. 근데 탑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텅 빈 뜨락에 혼자 서 있다.

 <‘조금 전에 우는 걸 봤다는 사람이 있는데?’/ ‘네 눈으로 직접 본 거나 옮기지.’> 늙은 시인의 농담이 1500년 전의 시간을 넘어 삶을 관통한다. “안 추워.”

정상철 기자 dreams@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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