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존’이란 단순히 ‘같은 공간에 있음’이 아니다. 같은 공간에 같이 있더라도,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숨이 턱턱 막히고,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없고, 끊임없이 자기를 속이거나, 검열하는 방식을 선택해야만 그 자리에 같이 존재할 수 있다면, 그건 공존하고 있는 게 아니라 같은 공간에 말 그대로 ‘우겨넣어’진 상태다. 어떤 공간에, 어떤 사람과 그야말로 ‘우겨넣어’져 있다면, 내가 편안해 지기 위해서는 무슨 방법을 쓰더라도 그 상황을 피하거나, 나를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하는 그 사람, 그리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바꿔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참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사람과 이런 상황에 놓여 있다면 불행 그 자체다. 어떤 사람 혹은 그 사람과의 관계, 혹은 그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구조를 바꾸기는 정말 어려운 법이고, 결국엔 화가 나고 짜증이 나더라도 내 자존감을 깎아 가면서 참아야만 한다. 정말이지 상상만으로도 고역이다.



‘불편해 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

 그런데 이 세상에서, 그 ‘불편해 하는’ 역할을 일방적으로 맡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여성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를 뛰어넘는 것으로, 한 여성과 한 남성이 서로 얼마나 ‘호의적’이냐 와는 별개의 사실이다. 개인과 개인 간의 관계에서 일시적인 반전이 있을 수 있지만, 그 반전은 “이 세상은 ‘여성이’ 남성과 공존하기 힘든 세상이다” 라는 말을 조금도 틀리게 할 수 없다. 여성과 남성은 인류의 절반이 어느 순간 멸종하지 않는 이상 서로가 서로를 피할 수 없고 결국엔 같이 살아야 한다. 그런데 한 성이 단지 어떤 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세상에 그 자신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고 우겨넣어진 상태라면 ‘우리는 잘 살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절반 정도만 진실이다. 누군가는 ‘잘 살고’있지만, 그 잘 살고 있는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의 자존감을 깎아가며 ‘참고’있다. 하루 종일 해도 티가 안 나지만, 한번 안 하면 티가 확 나는 ‘집안 일’처럼, 그 ‘참고 있는 사람들’은 감추어져 있다.

 경제 위기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미 남성은 홀로 생계부양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여성의 경제참여가 늘어났지만, 여전히 여성의 일자리는 저임금 불안정노동을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여성의 경제참여는 늘었지만 여전히 출산과 육아 및 가사노동의 책임은 여성에게 ‘당연히’ 기대되고 있다. 밖에서는 ‘완벽한 노동자’로 집에서는 ‘완벽한 어머니’이기를, 애초에 수행 자체가 불가능한 요구를 이중으로 받고 있다. 게다가 구체적인 폭력에도 더 크게 노출되어 있다. “남아선호에 근거한 여아 살해나 여성 성기절제에서부터 명예 살인, 염산 테러, 가정폭력이나 성폭력을 통한 살해, 지참금 살해, 전쟁 상황에서의 여성 집단 살해, 이주 여성 살해, 성 노동자 살해, 그리고 폭력적 상황에서의 여성 자살까지 수많은 여성 살해들이 벌어지고 있으며 가부장체제의 영향 속에서 남성 뿐 아니라 여성 역시 여성 살해의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참세상, 2013)”



공존의 조건을 고민해야 할 때

 200년 전, 여성 혁명가 올랭 드 구즈는 ‘자유, 평등, 박애’를 외쳤던 프랑스 혁명 시기에도 주체로서 인정받지 못했던 여성의 현실을 말하다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또 다른 혁명가 콜론타이는 러시아 혁명 시기에도 주변화 되어 있는 여성의 현실을 말하고, 구체적인 변화를 만드려다 동료들에게 외면 받았다. 가장 급진적인 시기라는 ‘혁명’시기에도 여성은 한 ‘사람’으로서 ‘공존’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노동시장, 가정, 정치의 영역 모두에서 현재 여성들의 현실은 어떠한지, 여성들의 스스로부터의 외침이 들려오고 있는 바로 지금,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여전히 이루지 못한 목표인 남성과 여성의 ‘공존’의 조건을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할지, 고민해야 할 때다.

서단비(mussein98@gmail.com)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