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벨 울리고 몇 분 후 “나오라” 지시뿐

 독보적 존재감인 여배우 김혜수 씨의 팬이다. 김혜수 씨가 스크린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는 소식이 반가워 퇴근 후 영화관으로 직행했다. 양손에 간식까지 사 들고 마음만은 가벼이 들어선 영화관. 나올 때의 반전은 꿈에도 몰랐었다.

 영화가 클라이막스를 향해 막 도약을 시작할 무렵. 극중 철없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김혜수 씨에게 새로운 사건이 닥쳤다. 이 때 들려오는 희미한 비상벨 소리를 신경 쓰는 관객은 없었다. 영화관 뒷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와 주세요”라는 한 마디가 들리기 전까지는….

 여기서부터 또 한 편의 영화가 시작된다. 다행이도 재난영화는 아니니 안심하고 귀 기울여 주시기를. 하지만 ‘만약’이라는 가정을 떠올린다면, 재난영화보다 더 손발이 후들거리는 아찔한 경험일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라’는 한 마디에 모든 관객들이 대이동을 시작했다. 다른 상영관에서도 비슷하게 지시를 받았는지 ‘일단 나가자’는 반응이었다. 매표소에서 영화를 기다리던 사람들까지 3층 높이의 건물 계단을 내려가는 인원은 수백 명에 달했다.

 승강기 이용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누군가 ‘화재 일수도 있으니 계단으로 가자’고 소리쳤고, 모두 서둘러 계단으로 몰려들었다. 드디어 영화관 건물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그런데 착지한 후 광명의 빛도 잠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이 어느덧 공포감으로 엄습해 왔다. 몸은 건물 밖으로 나왔지만, 발이 꽁꽁 묶인 사람들. 그 속에서 재작년 잔인했던 4월을 떠올린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마치 누군가 “가만히 있으라”고 명령을 내린 것 같았다. 이후 안내방송은 이어지지 않았고, 책임자는 코빼기조차 비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두리번거리며 또 다른 지시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 다시 영화관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시한폭탄과 같은 상황이었지만, 모든 것이 태평했다.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워 더 이상 그곳에 있기가 힘들어졌다. 영화고 나발이고 기약 없는 기다림을 서둘러 끝내기로 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엔 불안한 마음에 휴대폰으로 영화관 이름을 검색해봤다.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비상벨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누른 것으로 밝혀졌고, 항의한 관객들에게 환불해주며 상황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니다. 어떤 이유에서건 비상벨이 울렸던 상황 말이다. 다시 이 때로 돌아가 보자.

 왜 비상벨이 울렸는지 설명은 둘째로 두더라도 ‘어디로, 어떻게’ 대피해야 하는지에 대해 영화관 책임자는 안내하지 않았다. 다급한 순간에 영화 상영 전 본 대피안내가 떠오를 리도 없었다. 나오라하니 나갔고, 아무 지시도 없으니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다.

 다음날 영화관에 항의전화를 했다. 돌아온 답변은 비상사태를 파악하느라 다른 조치를 못했다는 것. 그럴듯한 변명 같지만, 방치된 관객들은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는 말로 들렸다. 촉각을 다투는 상황에서 기술자나 소방관이 해야 할 일을 모든 직원이 매달렸다는 말인가?

 또 영화관엔 긴급상황대피를 위한 매뉴얼이 없었거나 있더라도 숙지하지 않았음이 분명해 보인다. 진짜 긴급상황이었다면, ‘나오라’는 지시로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이동해야하는지 당연한 안내가 없었다는 점은 치명적인 실수가 아닐 수 없다.

 침몰하는 배에서 ‘바다로 뛰어내리라’는 안내방송만 있었다면 살 수 있었던 수많은 아이들. 이들의 희생이 남긴 한 마디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반드시 추가돼야 하는 것은 끝까지 현장을 지키며 사태 수습에 앞장서야 할 책임자의 임무다.

 ‘출발 전 배의 구조와 구명조끼 위치를 파악하고, 위험 신호가 감지되면 갑판위로 이동한 뒤 신고와 함께 구명조끼를 착용하는 것. 그리고 선체가 기우는 반대방향 최대한 높은 곳으로 피신하고 퇴선명령이 있으면 구명정을 타거나 뛰어내려야 한다.’

 또 다시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우리는 이 과정을 기억해 내고 대응할 수 있을까? ‘나오라’는 한 마디만 던지고 사라진 책임자나 ‘가만히 있으라’며 도망친 선장이 있는 한 우리의 안전은 결말을 알 수 없는 영화처럼 언제나 비상상황이다.

김우리 기자 ur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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