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메갈리아’라는 극단적 남성혐오주의 때문에 난리다. 그들은 여성의 권리만을 주장하며, 특히 남성에 대한 격렬한 혐오감을 드러낸다고 한다. 남성을 비하하는 언어를 쓰고, 어리고 풋풋한 남성에 대한 성적 찬양이 올라오고, 나이 많은 남성은 상장폐지 남성이라며 비하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렇다보니 누군가는 “남성혐오자들은 마치 IS나 나치와 다름없다”고들 한다. 이런 식의 남성혐오는 기존의 여성혐오와 전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정말 남성혐오와 여성혐오는 동등하게 나쁜가? “남성혐오는 여성혐오만큼 혐오스럽다”는 명제는 과연 정확한가? 그렇다면 남성혐오의 비교대상이 되는 여성혐오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옳다.

 여성혐오란 무엇인가? 여성혐오(Misogyny)는 ‘여성을 싫어하고 미워함’으로만 받아들여지는 일이 많다. 그러나 여성혐오는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여성에게서 인간의 주체성을 빼앗고, 여성을 숭배하거나 멸시하는 과정을 통해 대상화되는 과정을 뜻한다.

 

 가부장제와 세월 같이한 여성혐오

 여성혐오는 ‘남성을 인간의 기준으로 보는 사회’인 가부장제의 대들보 역할을 해온 만큼, 가부장제 존립 이후부터 꾸준히 존재해왔다고 봄이 옳다. 가부장제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자아는 여성혐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특히 가부장제 내에서 ‘성역할’은 이미 완성돼 있다. 남성은 인간(남성) 기준을 획득하고 여성성의 범주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여성(적 특징)을 비하·타자화해 주체성을 획득한다. 여성은 인간(남성) 기준 바깥에 있는 ‘이상적 여성상’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한다. 그러나 여성은 가부장적 여성상에 도달해야 한다는 피로감으로 인해, 여성상에 도달하지 못한 자기 자신에 대한 멸시를 느낀다. ‘이상적 여성상’에 대한 범주가 이분법적 시험대로 뒤덮여있기 때문이다.

 ‘성적으로 정숙한 여성이나, 성적으로 타락한 여성이냐’ ‘아름답고 성적 매력이 있는 / 젊고 어린 여성이냐, 뚱뚱하고 못나 사랑받지 못하는 / 늙은 여성이냐’ ‘(남성의 돈을 쓰지 않는) 검소한 여성이냐, (남성의 돈을 통해) 사치하는 여성이냐’ ‘성폭력을 당하지 않을 만큼 조심한 여성이냐, 성폭력을 당할만한 빌미를 제공한 여성이냐’ ‘모성을 가지고 집안 살림을 꾸리는 여성이냐, 모성 없이 가정을 파탄 내는 여성이냐’ 등의 수많은 이분법은 사적영역에서부터 공적영역까지 여성을 시험에 들게 한다.

 여성들은 시험대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가부장제의 ‘이상적인 여성’이 되고자 노력한다. 특히 가부장제가 멸시하는 여성상을 타자화하며 ‘나는 저들과 다르다’는 예외화를 취하는 여성들도 나타난다. 그러나 어떤 전략도 완벽할 수 없다. ‘이상적인 여성’은 가부장제가 여성을 손쉽게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진 환상 속의 타자이기 때문에, 여성은 최선을 다해도 범주 안에 완벽하게 들어맞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여성은 자신의 자아를 가부장제 안에 꿰맞추기 위해 애쓰며 원인 모를 고통에 시달리거나, 영문도 모른 채 범주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 낙인과 멸시, 대상화, 혹은 살해를 당한다.

 

 남성혐오, 여성혐오에 대한 공포서 비롯 

‘남성혐오’는 어떤가? 이미 10년 전부터 ‘남성혐오자’라는 낙인은 페미니스트들에게도 찍혀있었다.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한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이 남성에 대한 비난으로 읽혀진 탓이다. 최근은 미러링을 시도하는 ‘메갈’ 여성들에게 ‘남성혐오자’라는 낙인이 이뤄진다.

 사실 가부장제를 폭로하는 미러링이 시도된 사례로는 책 ‘이갈리아의 딸들’이 대표적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의 세계관은 가모장제로, 기존의 성역할을 뒤바꾸는 것만으로도 기존의 가부장제가 얼마나 불평등한 구조인지 드러낸다. 최근 ‘남성혐오자’로 명명되는 ‘메갈’ 여성들의 미러링 역시 한국 사회 내 여성 혐오의 잣대를 남성에게 그대로 옮겨봄으로써 그 허구성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 너무나 일상적이기 때문에 알아채기 어려운 여성혐오를 똑똑히 비춰주는 거울 역할을 자처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에 멈추지 않고 여성혐오 미디어 비판, 여성 몰카 공유 사이트 ‘소라넷’ 퇴출, 여성혐오 반대 시위 등 잠들어있는 여성혐오에 주목을 촉구한다.

 또한 ‘남성혐오’는 여성들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돼있다. 여성들은 신체적 대상화 경험, 성추행·성폭력 피해 고백, 데이트폭력을 휘두른 애인, 가정폭력범이었던 아버지, 언어적 성희롱과 모멸감, 강간과 살해에 대한 공포 등을 ‘이제야’ 쉴 새 없이 언어화한다. 그들은 “가부장제의 이상적 여성상이 되기 위한 과정이 얼마나 자신에게 폭력적이었는지, 가부장제에 굴종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하며 “미러링을 통해 자신이 묵인하고 있던 여성혐오가 얼마나 허무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고 이야기 한다.

 즉 다시 말해, 여성들의 남성혐오는 ‘여성혐오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다. 수많은 여성들은 가부장제라는 별 아래에서 보호받는 남성들로부터 실재적인 위협을 당했고, 또 가까운 미래에도 언제든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기저에 자리한다. 남성혐오에는 실체가 없다. ‘나치’나 ‘IS’에 비교되는 남성혐오는 여성혐오와 달리 남성의 삶을 틀 안에 구획시키지 못하고, 사회 전반의 가치관이 되지도 못한다. 혹은 남성을 신체적·구조적으로 억압하거나 위해를 가할 수도 없다.

 

 ‘남성혐오’ 카드 꺼낸 이유 고민해야

 가부장제 아래에서는 남성혐오라는 낙인이 찍힌 여성이 협박과 폭력에 시달린다. 한 성우는 ‘메갈’이 제작한 티셔츠를 입은 후 일방적인 계약 해지를 당하고, 여성혐오 반대시위에 나선 여성들은 지나가던 남성들에게 폭언을 듣고, 몰카에 당해 인터넷 상에서 ‘메퇘지’ ‘쿵쾅이’ 등 신체적 조롱을 당하고, 모 신문사의 페이스북에서는 ‘넥슨 사옥에 돌진한 차량이 여성혐오 반대시위 참여자들을 치지 않았다’며 아쉬워하는 뉘앙스의 농담을 던지는 것처럼.

 남성혐오가 문제가 될 소지는 얼마든지 있다. 남성혐오가 실존하는 개인 혹은 약자에게까지 아무런 이유 없이 쏟아지는 부작용 사례도 종종 발견된다. 그러나 기존 남성혐오는 ‘가부장제와 여성혐오가 유지되길 바라는 남성’에 대한 혐오를 지향하고 있다. 이는 여성혐오로 인해 짓눌린 여성들이 가부장제 권력을 희화화하는 풍자 행위다. 남성혐오는 ‘(암묵적으로) 가부장제와 여성혐오가 유지되길 바라는 남성’의 감정을 다소 상하게 하고, 더 나아가 여성혐오를 가시화시킨 것 외에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지금의 ‘남성혐오’가 끔찍하다는 말은 즉 원본인 여성혐오가 그만큼 끔찍했다는 뜻이다. 그러니 ‘남성혐오과 여성혐오는 똑같이 나쁘다’라는 말 이전에, 왜 수많은 여성들이 ‘남성혐오’라는 카드를 꺼내기 시작했는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폭력, 여성 살해, 가정폭력을 저지른 남성들의 범죄 이유에 대해서도 언제나 귀기울여주지 않았나.

양유진 기자 seoyj@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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