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에 참가했던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이야기는 민감한 문제라고 했다. 그렇지만 불편하다고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폭설과 한파로 추웠던 한국을 떠나 따뜻한 나라로 가는 것만으로도 부럽다며 배웅을 받았지만 막상 도착한 베트남은 몹시도 춥다고 느꼈다. 인도차이나반도가 이상기후라 했다. 호치민에서 중부로 올라가는 일정 내내 작렬하는 태양을 마주하지 못해 오히려 한국에서 입고 간 겨울외투가 없었다면 힘들었을 지경이었다.

민간지 학살지·생존자 만남 여행

 얼마 전 베트남 전쟁시 민간인 학살지와 생존자들을 만나고 온 고백여행(GOBACK/한베평화재단 주관)을 다녀왔다. 날씨만큼이나 마음도 무거웠던 순례길이었다.

 7일간의 일정동안 곳곳에 남겨진 전쟁의 폐허와 잔인했던 학살의 기록들을 보았고 어떻게든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고통과 피해 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 제주 4·3과 광주 5·18, 일본군 성노예제 피해자들이 오버랩이 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1968년 베트남 중부지역에서는 미군과 한국군에 의한 대규모 학살이 곳곳에서 자행되었다. 올해로 50주년을 맞이한다. 베트남 꽝남성의 퐁니·퐁넛 마을 학살사건은 2월 12일에 일어났으며 70여명이 살해되었다. 하미마을은 2월 22일 비무장 민간인 135명이 학살당하고 가매장 당했다. 3월 16일은 밀라이지역에서 500여명의 민간인이 희생된 날이다. 전쟁에서 숫자가 꼭 참혹함의 정도를 말하지는 않는다.

 학살 지역에는 어김없이 위령비와 증오비가 세워져 있다. 베트남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위령비와 증오비에는 미군/한국군이 저지른 만행과 희생자가 똑똑히 새겨져있었다. 대부분의 희생자는 여성과 어린아이였다.

“한국군에게 묻고 싶다, 왜 쐈나?”

 당시 8살 어린아이였던 퐁니 마을의 탄아주머니가 “지금도 한국군에게 묻고 싶다. 그때 왜 우리 가족을 쏘았는지” 라고 말했을 때 우리들은 아무도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기 전까지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베트남도 설을 쇠는 문화라 설전에 찾아온 손님은 여느 때보다 특별하고 반갑게 맞이한다고 한다. 우리 평화기행단이 그랬다. 생각보다 잔혹했던 전쟁기록들을 마주하게 되고, 종전이 되었음에도 지금도 일상에서 전쟁의 후유증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미안한 마음에 울먹이는 우리를 오히려 안아주고 토닥여준 사람도 그들이었다. 이런 그들의 마음이 우리들을 베트남에 오게 한 힘이 아닐까 싶었다. 과거 역사를 기억하고 이어가는 다양한 노력들을 배우고 전쟁은 안 된다는 평화의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달하는 일들 말이다. 내가 속해 활동하고 있는 ‘광주나비’도 이들과 연결되어 활동을 할 것이다.

 돌아오면서 베트남이라는 나라를 다시 생각해보고 전쟁 피해 생존자들이 피해자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평화운동가로서 사는 것, 평화는 우리 주변의 일상의 폭력성을 없애는 노력부터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중 한국으로 결혼하러 왔던 푸엉의 안타깝고 미안한 사연을 접하게 된다.(친족성폭행·혼인 취소…한 베트남 결혼이주여성의 ‘약탈 14년’, www.hani.co.kr/arti/society/rights/828611.html)
백희정<일본군성노예문제정의로운해결을위한 광주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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