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해 일본 기업이 배상하라는 판결이 우리나라 대법원에서 이뤄졌다.

 소송 개시 후 13년 만이고 대법원에 이 사건이 접수된 지 5년 2개월 만이다. 만시지탄이지만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에도 불구하고 개인들의 손해배상 청구권과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을 확정했다는 의미가 있는 판결이다.

 이번 소송엔 참여하지 않았지만, 같은 피해를 당한 어르신들에게 배상의 길이 열렸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다만 피해자들이 90대의 고령이어서,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게 우려스럽긴 하다.

 최근 광주시는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광주지역 생존자 구술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 광주시 공익활동 지원 보조금 사업을 수행하는 ‘시민모임’은 올해, 강제징용 피해자 중 연락이 닿은 20명을 대상으로 구술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작업에 참여중인 한 인사가 했던 말이 예사롭지 않았다. 구술작업을 위해 만난 강제징용 피해자 대부분이 ‘1924년생’이더라는 것이다. 그들로부터 “묻지마라 갑자생”이라는 한탄을 많이 들었다고 했다.

 1924년이 육십갑자로 갑자년이다. 10간(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과 12지(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를 결합해 얻은 60개의 간지 중 제일 첫자리가 ‘갑자’다. 예의 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낸 원고 중 유일한 생존자인 이춘식(95) 할아버지도 갑자생이었다.
 
▲특정세대에 유독 가혹했던 현대사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는 왜 갑자생이 많았을까?

 우리 현대사는 1924년생에겐 특히 가혹했다. 그들이 성년인 만 20살이 된 때가 1944년이다. 2차대전도 막바지, 패전의 기운이 감돌았던 일제는 이 무렵 조선 젊은이들을 무차별로 징집해 전선으로 내보냈다.

 이때 표적이 된 이들이 20살 청춘들, 즉 갑자생들이었다. 당시를 증언하는 한 어르신은 “갑자생은 신체적으로 큰 결함만 없으면 무조건 징집 판정을 내려 전선으로 차출됐다”고 회고했다. 이들에게 “묻지마라 갑자생”은 질곡의 역사 속 누구보다 가혹한 희생을 치른 세대라는 한이 서려있다.

 돌이켜보니 선친도 갑자생이었다. 생전에 비슷한 말을 많이 하셨다. ‘묻지마라 갑자생’ 기준에 걸려 강제징용에 끌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해방을 맞이한 조국에서 다시 군복무를 해야했다. “군대를 두 번 다녀온” 고생담이 절절했다. 자주 듣다보니 무감해졌고, 흘러간 ‘옛 타령’같아 마음에 오래 담아두지 못했다.

 당시엔 선친만의 특별한 불운이라고 생각했다. 선친은 또 “일본 사람들은 어떻다”는 식의 품평도 자주했다. 대개 조선 사람과 비교해 예의나 생활상을 칭찬하는 내용이 많았다. 가해자에게 동화된 피해자랄까, 감정의 모순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한편 생각해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1924년생 그들은 독립된 국가를 경험한 적 없다. 날 때부터 식민지였으니, 일제강점이란 현실이 오래된 일상처럼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중 광주지역 생존자는 120여 명 쯤으로 추산된다. 이중 20여 명이 근로정신대, 나머지 100여 명이 강제징용 피해자라는 것이다. 올해로 95살, 수많은 갑자생들이 한을 풀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그들은 할만큼 했다. 지금부턴 정부가…”
 
 갑자생들의 고통, 국민을 보호하지 못한 국가가 책임지고 회복시켜야 할 상처다. 하지만 국가는 해방 이후에도 그들을 돌보지 않았다. 되레 고통을 더했다. 한일청구권 협약을 맺어 개인의 손해 배상 길마저 봉쇄했던 게 자신들의 정부였다.

 최고법원은 피해자 개개인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을 지연하고, 방해했다.

 뒤늦게나마 대법원이 일본 전범기업에게 손해배상 판결을 내린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나, “너무 늦었다”는 지탄을 피하기 어렵다. 그 소송에 참여한 원고 4명 중 3명이 사망해 지난달 대법원 선고때 원고석엔 피해자 한 명만 자리했을 뿐이다.

 대법원 승소 판결 후 시민모임 이국언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개인들이)오랜 투쟁 끝에 쥐어준 이 역사청산의 고삐를 꽉 쥐고, 책임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

 ‘묻지마라 갑자생’은 원래 자부심의 표현이었다. ‘육십갑자’의 첫해인 갑자년에 태어난 이들이 재주가 많다는 게 유래로, “물어볼 필요도 없이 틀림없다”는 의미였다.

 국가가 외면해도 포기하지 않고 개별 소송에 나선 주축이 그들이다. 그리고 끝내 이뤄낸 법적 투쟁 승리까지…. ‘묻지마라 갑자생’들이 증명해낸 ‘자부심’의 산물이다.
채정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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