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찻길+도시'의 추억 10.8km]
<3> 동명동~남광주역

▲ 1930년대 남광주역 일대 모습. 멀리 기차가 보인다.









 ▲ 남광주역.



철로가 도심을 가로지르다

광주의 도시확장이 광주읍성이 위치해있던 현 동구를 중심으로 진행돼 온 것은 광주 근대 역사가 기찻길과 함께 할 수밖에 없는 필연을 제공한다.

일제시대 일본이 철로를 놓을 당시만 하더라도 동명동은 도심의 외곽이었다. 동명동 안쪽으로 1906년 공립광주보통학교(서석초교)를 시작으로 1907년 광주 거주 일본인을 위한 학교인 광주심상소학교(중앙초교)가 생겼고 1927년 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전남여고) 등이 문을 열었다. 












 ▲동명동에 있는 한옥과 일본 건축양식이 결합된 한 주택. 70여 년 됐다.



해방, 한국전쟁 후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 광주로 올라왔는데 그 곳이 광주천 근처, 양림동·지산동  일대다. 당시 이곳은 허허벌판이어서 땅값도 싸 학교 또한 많이 들어섰다. 1947년 중등학교 현황을 보더라도 13개의 학교 중 9개의 학교가 동구와 남구 양림동을 중심으로 들어서 있었다. 동명동 현 오페라하우스(예식장)가 들어서 있던 곳은 해방전 소년형무소 자리. 이후 광주여중(현 동명중)이 53년 그곳에 건립됐다. 지산동·학동에 조대부속중(51년), 조대여고(69년) 살레시오여고(60년), 광주춘태여자상업고(67년)가 생겼다.

광려선이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게 된 것이다. 때문에 기찻길과의 애환이 많은 동네가 이 곳이다. 











남광주시장 건물에서 바라본 학동과 양림동. 옛 건물과 신축 아파트가 공존하고 있다.
 ▲남광주시장 건물에서 바라본 학동과 양림동. 옛 건물과 신축 아파트가 공존하고 있다.



 

기차 때문에 울고 웃다

“아이들 학습의 장애가 말도 못하지. 하루에 기차가 50회를 지나다녀, 지나가면 집들이 움직이는 진동, 그담에 기차 지나가는 소음, 그담에 기차 고동소리 말도 못하제. 기차가 지나가면 테레비(TV) 화면이 흐려.”

한 주민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했다.

자취생, 하숙생이 많아 재미있는 기억도 있다.

“기찻길 가에 호박같은 거 심어갖고 자취생들이랑 아줌마들이랑 같이 전 지져서 먹고. 폭죽도 터뜨리고 놀았어.”

“집에 전부 자취·하숙 쳤지. 난 자취하는 학생들한테 도시락 반찬 팔았어. 학생들이 우리집에 반찬통 갔다 놓으면 통에 500원 받고 팔았지.” 동명동에서 산 지 40년 됐다는 박순내(78)씨의 말이다.

철길은 놀이터이기도 했다.

“주변에 자갈이 많기 때문에 돌 가지고 던지면서 장난을 하기도 했고, 레일 위에 동전이나 못을 놔두면 기차가 지나가고 나서 쫙 펴지거든요. 그런 거 가지고 놀았죠.”

이제는 30대 중반이 된 한 주민의 설명이다.

철길이 없어진 폐선부지는 현재 학생들의 안전한 통학로가 됐다. 현재는 자갈뿐이지만 곧 푸른길로 바뀌게 되면 아이들은 녹음 속을 걷겠다.

 



과거를 품고 있는 건물들

학동은 1947년 일본식 명칭인 학강정을 고쳐 부른 것인데 학강이라 한 것은 이곳 지형이 무등산의 줄기가 학처럼 내려와 앉은 형국이라 한 것에서 비롯됐다. 무등산의 줄기를 일제시대 때 철로가 잘랐고 80년대 제1순환도로(현 필문로)가 또 한번 잘랐다. 










광주여자학숙으로 이용되고 있는 옛 춘태여상 건물.
 ▲광주여자학숙으로 이용되고 있는 옛 춘태여상 건물.



푸른길 주변을 걷다 보면 택지개발로 아파트 올린 신도시와 달리 과거를 마주할 수 있는 공간들이 펼쳐진다. 학동의 조선대병원 장례식장 앞이 그러한 곳. 장례식장 앞으로 돌담이 쭉 늘어서 있는데 그 안을 들여다보니 돌로 지어진 건물과 사당이 보인다. 건물은 현재 광주여자학숙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옛 춘태여상 건물이다. 66년 학교법인 설립인가를 받은 춘태학원은 68년 춘태여상(현 전남여자상업고등학교)을 개교했고 82년 삼각동으로 이전했다. 건물 뒤편에는 무광사가 있다. 이곳은 춘태학원의 춘담 최병채씨가 57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 임진왜란 때 순국한 이 고장 출신 충장공 김덕령, 문열공 김천일, 충장공 정운 등의 충절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건립했다고 한다. 해마다 충무공 탄신일인 4월28일 춘향제를, 기일인 12월16일에는 추향제를 지낸다. 이곳에는 이보다 이전에 생긴 대광사라는 절도 있는데 그 당시에는 산에 있는 절이었겠으나 이제는 도심 안의 절이 됐다. 조선대병원 장례식장은 일제시대 때 광주에서 처음 생긴 배수지가 있던 곳으로 일본인들은 이 주변에 일본 국화인 벚나무를 많이 심었다. 












 ▲남광주시장.

 

남광주시장의 영화 그리고 푸른길

광려선이 34년 개통되고 남광주역도 영업을 개시했다. 남광주시장의 출발은 60년 대 초. 대합실과 옛 학동파출소 사이의 공터에서 처음 시장이 열렸다.

“나주·보성·벌교·화순 등에서 할머니들이 텃밭에서 키운 농작물과 바닷가 갯벌에서 채취한 수산물들 보따리에 싸서 통학열차 타고 와서 팔았어. 촌에서 도시로 학교 보냈잖아. 할머니들이 농수산물 판 돈으로 손자 손녀 학비도 대주고 그랬어.” 남광주시장번영회 윤수일(70) 회장의 설명이다. 










 ▲남광주시장 안 여인숙촌.



시장이 번성하게 된 것은 70년대. 철도청이 정거장 구내의 땅과 건물을 민간에 불하했고, 이를 인수한 사람이 상가로 만들면서 시장은 날개를 달았다고 한다. 90년대 중후반 대형마트, 백화점이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남광주시장은 영화를 누렸다. 점포수만도 450곳이나 됐고, 생선골목·의류골목·국밥집골목 등 골목별 특성도 있었다.

번영회건물 4층에 카바레가 운영됐는데 “80년대 4톤 트럭에 가득 실은 맥주가 다 팔릴 정도로 북적였다. 내 가게도 손님이 귀찮을 정도로 잘 됐는데 도청 옮겨가고 이렇게 타격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 윤 회장은 말했다.

현재 시장 주차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곳은 푸른길 공원부지. 이곳이 공원으로 바뀌고, 시민 휴식공간으로 활용될 객차가 놓여지면 지금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이 남광주시장을 찾게 될 지 모른다.

조선 기자 sun@gjdream.com












 ▲ 철길의 흔적이 남아있는 남광교 옆 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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