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가 밀려온다 기로에 선 마을들]<12>소촌동 남계마을
토박이 55세대 중 20여 세대 남아 “몇 년 가믄 없어질 것이여”

▲ 물이 좋았다는 마을, 고요했다는 마을, 광산구 소촌동 남계마을이다. 일제시대 착취를 견뎠고 70년대 포사격소리도 버텼지만 개발 앞에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광주경찰청이 들어서는 바로 그 마을이다.

질곡의 세월을 견뎌낸 마을이다. 일제시대 착취로 헐벗었고 질기게 버텨온 생명줄 위로 포성이 뒤덮었다. 70년대 군부대가 이전하고 포성이 멈출 무렵 마을 사람들은 ‘공장’의 굉음으로 밤새워 뒤척여야 했다. 그렇게 버틴 150여 년 세월. 하지만 ‘개발’이란 명목 앞에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다. 광산구 소촌동 남계마을이다.

남계마을. 조선조 말 충주박씨와 함양박씨가 들어오면서 개척했다. 마을 앞에 밭을 일구고 논을 개간해 마을을 이뤘다. 그렇게 모여 50여 세대가 넘게 살았다. 바로 윗동네 선계마을과 합쳐서 남계리로 불리기도 했다. 마을 뒤편 주봉산 자락에 남성사란 절이 있어 남성리로도 통했다.

남계마을은 원래 고요한 동네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바람 잘 날 없는 마을로 변했다는 게 주민들의 말이다. 일제 치하에서 논과 밭의 모든 곡물은 수탈당했고 주민들은 하루하루 배급을 받아 살았다. 일제는 더 많은 착취를 목적으로 마을 앞에 저수지를 축조했다. 공사는 순전히 마을 주민들의 몫. 10살 어린 나이에도 일을 나가야 했다.

“농사 지으믄 다 뺏어 가불어. 공출하라고 한디 안내믄 워치케 닥달하는지 말도 못해. 일을 안하믄 배급을 못받응께 일할 수밖에 없었제. 저수지는 우리가 지게로 흙 짊어져 만든 것이여.” 5대째 살고 있다는 이종옥(72) 할아버지의 기억이다.

배고픔은 산도 밭으로 만들었다. 마을 뒤편 주봉산은 지금은 수풀이 우거졌지만 30~40년 전만 해도 밭이었단다. 이 할아버지는 “60~70년대 산림 녹화사업으로 나무 심기 전까지만 해도 주봉산은 밭이었다”며 “그 밭에다 호밀을 심어 감자랑 섞어 죽을 끓여 먹었다”고 회상했다.

한국전쟁 직후에는 바로 앞산에 포부대가 들어서면서 ‘고요’를 깼다. 공군부대와 함께 자리한 포부대는 매일 같이 포사격 훈련을 실시했다. 지금의 광주여대 자리가 포 사격장. 밤낮 없이 포탄 소리가 울려 퍼져 잠을 못 잤을 정도. 이화웅(65) 할아버지는 “앞산에 찰리포부대가 들어서면서 155미리, 75미리, 로켓, 전차포 등 밤낮으로 사격 훈련을 했다”며 “종종 마을 위에서 포탄이 터지기도 했다”고 말했다. 군부대 때문일까. 남계마을에는 별 3개를 단 ‘장군’도 나왔단다. 선영제 전 육군참모차장이다.

70년대 포부대가 장성으로 이전하면서 마을은 고요를 되찾은 듯 했다. 하지만 이번엔 대포소리 대신 기계 굉음이 울렸다. 78년도 구획정리하면서 마을 앞 논이 공업단지와 상가 등으로 바뀐 것. “대포소리 안들리더니 소촌2공단이 들어서면서 기계 돌아가는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잔다”는 게 주민들의 하소연이다. 내세울 것 없는 마을이지만 마을 토박이들은 “물이 좋았다”고 입을 모은다. 온통 가뭄이 들어 인근 마을 샘물이 말라붙어도 남계마을만큼은 물이 넘쳐났다는 것. 40년 넘게 살았다는 서영순(80) 할머니는 “앞마을 가마골만 가도 가뭄에 물이 없어 난리가 났는데 이곳은 물이 많고 좋았다”며 “집에 있는 샘물로 대여섯 마지기 농사 다 짓고 남의 논에도 물 퍼줄 정도였다”고 말했다.

남계마을은 10여 년 전부터 무지개마을, 라인, 금호 아파트 등이 들어서면서 점차 헐리고 사라지고 있다. 토박이들은 애초 55세대에서 20여 세대로 줄었다. 마을의 미래 역시 불투명하다. 150여 년의 역사도 머지않은 듯 보인다.

“몇 년 가믄 마을도 없어질 것이여. 여그 땅도 외지 사람들이 다 사놔 부렀어.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여. 갈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도 여그서 죽어야제.”

70년 넘게 살았다는 이모씨의 말이다.

박준배 기자 nofate@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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