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림동 문화를 찾아서]<3> 광주기독병원
1970년 기독병원 개편…5·18 등 현대사 증인

▲ 1905년 광주 제중원.

 이념이 아닌 생명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있었기에 존재했던 빈민과 나환자들의 보금자리, 양림동. 이곳에서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한센병 환자들을 보듬은 재활시설과 아픈 이들을 위한 병원 등이 있었다. 지금도 그 정신과 자취는 광주기독병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1905년 목포 선교부가 폐쇄, 광주 선교부로 결집되면서 광주에 최초 선교병원이 생겨나게 된다. 1905년 11월20일 놀란(Dr. J W Nolan) 선교사는 광주기독병원의 모태가 되는 `제중원’을 설립한다. 당시 그가 9명의 환자를 진료하면서 광주에서 현대의료가 시작된 것이다.

 1년여 뒤인 1907년 4월 놀란이 선교사 직을 사임하자 광주의 의료선교는 중단된다. 하지만 1908년 우월선 선교사가 광주 의료 선교를 맡으며 광주에서 본격적인 현대 의료시설이 하나 둘 생겨나게 되고 지금의 모습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당시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은 미신적 질병치료와 비과학적인 민간요법에 의존했던 사람들에게 과학적인 질병 치료의 기회를 제공하고 미신에 의존했던 사고방식을 전환 시켜 주는 계기가 된다. 특히 여성 진료의 혜택이 늘어나면서 여성들의 산부인과 치료와 가정의 위생상태가 나아지고 이는 의료 교육의 기회 확대로까지 이어진다.

 미국 남장로교 한국 선교회의 규정에 따라 전라도 다섯 지역(군산, 전주, 목포, 광주, 순천)에 세워진 각 선교부 소속 선교병원에서 한국인 의료인을 양성한 것이다. 먼저 남자를 중심으로 조수를 양성하고, 다음으로 간호사를 배출하게 된다.

 의료인으로 처음 발굴된 사람은 최흥종 목사. 독립운동과 나환자 치료에 일생을 바친 최흥종 목사는 젊은 시절 악명 높은 폭력배 생활을 하다 미국 선교사들의 희생정신을 체험한 뒤 나병 환자들에 관심을 갖게 된다. 1909년 제중원에서 나병 환자를 치료하는 조수로 일하기 시작한 그는 1912년에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봉선동의 땅 1000평을 무상으로 기증, 우월선 선교사와 함께 한국 최초의 나환자 수용시설인나환자요양소(광주나병원)을 설립한다. 이곳은 증축을 거듭하면서 350여 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500여 평 규모의 요양소와 집단 거주지를 조성하고 나환자 치료를 물론 완치 후 자활할 수 있도록 직업교육까지 병행했다. 1926년 11월 여수 애양원으로 이주되기까지 나환자들의 천국이고 보금자리 역할을 한 것이다.

 현재 많은 간호사를 배출하고 있는 기독간호대학의 모태가 되는 제중원내의 `간호부양성소’. 1930~1940년 제중원의 간호업무 책임자였던 변마지 간호선교사가 현지인 간호사 양성을 위해 1932년 제중원내에 간호부양성소를 설립하면서 간호교육이 시작됐다. 1940년 병원이 폐쇄되기 전까지 총 9명의 졸업생을 배출한다. 하지만 제중원이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로 1940년 학교와 병원 모두 폐쇄되면서 간호교육도 함께 중단된다. 이후 1966년 이철원 선교사의 노력으로 수피아간호학교가 설립돼 간호교육이 재개되고 현재 기독간호대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광주현대의료의 시작이자 희생과 나눔, 생명 존중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있는 광주기독병원은 1951년 고허번 선교사가 광주제중병원 5대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병원이 재개원되고, 1970년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 유지재단에서 분리돼 재단법인 광주기독병원으로 개편됐다. 이후 5·18민중항쟁 당시 총상환자와 부상당한 시민들의 피난처로 그 역할을 다하고, 지난 2005년 개원 100주년을 맞이했다.  강련경 기자 vovo@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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