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전방·일방 전신 `가네보’ 광주로
목화 주산지·탄광 인접한 광주로

▲ 현재 임동 일대 전방·일방 공장부지 전경. 70여 년 넘게 광주의 산업화를 이끌어왔다.

 전남방직·일신방직의 전신인 종연방직(종방·일본식 이름 가네보)은 요즘 경제 용어로 치면 다각 경영을 펼쳤다.

 미쓰이 그룹 계열로 방직은 물론 철강·탄광·화장품에 이르기까지 손대지 않은 업종이 없었을 정도.

 “장의사·청소업만 빼놓고 안 해 본 사업이 없다.” `70년대 가네보 오사카 본사를 방문한 바 있다’는 `광주 100년’ `무등산’의 저자 박선홍 선생이 당시 회사 관계자에게 들은 말이다.

 “시세이도는 끝났고 이젠 가네보 시대라고 선언할 정도로 자긍심이 높던 시절이었다”고 그는 기억했다.

 가네보의 성장 동력은 식민지였다. 원료와 인력을 값싸게 제공받고, 제품의 판매처까지 식민지에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네보의 광주 진출도 이런 전략의 일환이었을 터.

 1930년 지금의 학동 세라믹 자리에 제사공장을 설립했다. 방직업의 주원자재인 목화 산지에 실을 뽑는 공장을 세운 것이다.

 광주천 상류로, 공업용수 공급도 염두에 뒀을 것이란 분석도 더해진다.

 화순탄광과 인접한 지형도 고려됐을 법 하다.

 공장을 가동할 동력으로써 석탄 공급은 필수였기 때문이다.

 가네보는 한 발 더 나아가 화순탄광을 아예 인수했다. 실사단을 보내 매장량 등 경제성을 분석한 뒤였다.

 제사공장을 경영하던 가네보는 몇 년 뒤 더 큰 사업을 구상했다.

 대규모 방직공장을 세우기로 한 것. 입지는 정해지지 않았는데, 전남도가 공장 유치전에 적극 뛰어 들었다.

 `광주 100년’은 <당시 전남지사인 야지마와 상공회의소를 중심으로 공장유치전이 전개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일본 본사를 찾아가 공장 건설에 따른 모든 편익제공을 약속하는 등 파격적인 인센티브로 유치에 성공했다. 1935년 이었다. 

 

 ▲ 1930년대 세워진 종연방직(가네보)은 해방 후 `전남방직공사’라는 명칭으로 김형남을 관리인으로 두었다. 1960년대 전남방직주식회사 모습.  <광주시립민속박물관 발간 `光州’제공>

 

 

 

 

 

 

 

 

 

 

 종연방직 전남공장의 탄생이었다. 현재 전방과 일방이 위치한 바로 그 자리다.

 <전남지방이 목화의 주산지이며, 자가발전에 필요한 석탄 공급이 용이한 화순탄광 인접지역이었다.> `일신방직 50년사’도 최적의 입지임을 기록하고 있다.

 정순목 전남방직 노조위원장도 “60·70년대까지만 해도 화순탄광에서 올라온 기차가 공장까지 들어왔다”면서 “원동부에서 석탄을 짓이겨 연료로 땠다”고 증언했다.

 “원료인 목화는 전남지방에서 많이 나고 목포항이 공출 통로였지만, 공장에 필요한 노동력은 광주지역에서 구하기가 쉬웠죠.” 작물과학원 목포시험장 배상목 전 연구원은 목포가 아닌 광주에 터를 잡은 가네보의 입지 배경을 나름대로 분석했다.

 당시 이 터엔 임업시험장이 있었다. 인근 신안리의 논밭들도 공장 부지로 수용됐다. 모두 10여 만 평 대규모였다.

 그때만 해도 수질이 좋았던 광주천이 인근이었다.

 10만 평 중 공장용지는 5만 평, 나머지 5만 평은 시민공원 등 위락시설이 들어설 계획이었다.

 <당시 이를 건설하기 위해 가네보가 계획한 예산은 100여 만 엔에 이르렀다>는 것이 `광주 100년’의 기록이다. 박선홍 선생은 “공장을 위해 문전옥답을 내준 시민들에 대해 보답하기 위한 시설이었다”고 해석했다.

 식물원·동물원·공설운동장 등이 계획됐고, 첫 조치로 수영장이 건설됐다.

 현재의 무등경기장 일부를 포함한 임동 일대가 `가네보랜드’였던 셈이다.

 시설 규모 역시 엄청났다.

 `일신방직 50년사’가 기록한 창업 초기 가네보는 <방적기 3만 5000추, 직기 1440대, 종업원 3000명>으로, 국내 최대 규모였다.

 중일전쟁·태평양전쟁 등으로 이어지는 전시체제에서 가네보는 군수공장의 역할을 담당했다.

 군복용 옷감을 생산하는 등 국가전시체제에 복무하게 되면서 광주진출 당시 약속했던 시민위락시설의 건립은 계획대로 완성되지 못했다. 그리고 1945년 일제가 패망했다.

 기술자 등 핵심 요원들이 일제히 빠졌다. 가동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노동자들이 먼저 나섰다. 자주관리위원회를 꾸려 전남방직주식회사로 간판을 바꾸고, 스스로 운영에 나선 것.

 하지만 일제 대신 등장한 미 군정은 가네보의 관리책임자로 김형남을 임명했다.

 1952년 적산 불하가 진행됐다.

 기득권을 갖고 있던 관리자 김형남은 전남방직을 인수했다.  글=채정희 기자 goodi@gjdream.com

 사진=임문철 기자 35mm@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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