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청-극장-경찰서, 말 그대로 `명동거리’였지”
일제 때부터 운영…1960년대 재건축 `최신식 건물’
광산구 청사 뒤편으로 겨우 70미터 떨어진 곳에 송정극장은 있었다.
지금은 간판도 없고 유리창 대부분은 깨진 채, 곧 쓰러질 듯한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라 그 곳에서 옛 극장의 모습을 찾아내긴 쉽지 않다. 하지만 엄연히 광주의 극장역사에서 해방 전부터 시작된 무등극장과 광주극장에 이어 세번째로 ‘극장’이라 불렸던 곳이다.
주민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극장 건물 내 유일한 세입자인 옷수선점 김덕순(45) 씨는 “40~50대의 경우 지나가면서 이 곳이 옛날 극장이었다는 얘기를 하곤 한다”고 했다. 극장 맞은편 식당 주인 강영복(70) 씨도 “오일장으로 가는 통로여서 극장이 잘 될 때는 일대가 엄청 북적였다”며 “더욱이 좌우로 군청(현 구청자리)과 경찰서를 끼고 있어 이 곳은 말 그대로 ‘명동거리’였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극장 앞을 흐르는 도로명이 실제 ‘명동로’다.
송정극장의 산 증인은 인근 주차장에 가면 만날 수 있다. 마인배(89) 옹이다.
극장 소유권은 이미 20년 전에 친인척에게 넘겼지만, 지금껏 주위로부터 ‘마 사장님’으로 불린다. 그는 “하도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다”면서도 역사를 털어놨다.
그에 따르면 송정극장은 해방 전 일본인의 2층 목조건물에서 시작됐다. 지금도 건물 등기부를 떼어보면 ‘1943년 6월1일’자로 접수된 등본이 하나 더 나오는데, 소유자는 ‘청산태순’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돼있다. 광산구청 관계자는 “건물 공부상엔 없는데, 아마 송정극장의 첫 주인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이후 송정극장은 광주극장에 넘어갔다가, 1948년 마 사장이 당시 돈 180만원을 주고 사들인다. 일본에서 상고를 나왔던 마 사장은 귀국 후 한국전력의 전신인 조선전업과 전남도청에서 근무한 적도 있다. 이같은 경력 덕에 미군정하 전력부족 상황에서도 군청·경찰서와 함께 안전한 전기공급이 가능했단다.
주요 관객들은 광산군민들이었지만, 극장은 활황이었다. 1964년엔 기존 건물을 허물고 770㎡ 부지에 3층 520석 규모의 극장을 새로 지었는데, 그게 지금의 건물이다. 마 사장은 “당시 극장 주변은 단층짜리 ‘하꼬방’들 뿐이었으니, 그때 송정극장은 일대 최신식이자 최고건물이었다”고 회고했다.
70년대엔 다른 극장들처럼 가극이나 창극 공연도 했단다.
▲ 영사기도 없이 폐허처럼 방치된 극장 영사실엔 95년 동시상영했던 만화영화 할인권이 아직 남아있다. |
송정극장에서 영화상영은 2000년대 초반까지도 띄엄띄엄 이어졌다. 하지만 지금 영사실 자리에 뒹구는 할인권에 이미 95년 3월 상영했던 작품이 ‘간첩 잡는 똘이장군’과 ‘공룡 백만년 똘이’ 동시상영이었던 걸 보면, 저간의 사정이 짐작된다.
과거 송정리에는 송정극장과 쌍벽을 이뤘던 동양극장도 있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광산구의회 건물에서 남쪽으로 한블럭 더가면 첫번째 사거리 모퉁이 일대였다.
마 사장은 “광주의 갑부 김종수 씨가 송정극장의 성공을 보고 군청 근처에 250석 규모의 동양극장을 지은 게 1961년이었다”며 “그러자 내가 다시 3년 뒤에 송정극장을 더 크게 신축했다”고 했다.
이렇게 두 극장은 경쟁했지만, TV라는 ‘공동의 적’이 등장하자 손을 잡기도 했다. 영화 선정부터 함께 하고, 각각 상영한 뒤 수익금을 똑같이 나누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동맹’은 2년을 넘기지 못했다. 이 방식으로 극복될 위기가 아니었던 탓이다.
결국 마 사장은 3년 쯤 전, 영사기 두 대를 골동품 수집상에게 팔았다. 극장 신축 당시 일본서 들여온 최신형 ‘로얄영사기’였는데, 당시 송정리 본정통 집값(100만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돈을 들였다. 하지만 40년 지난 골동품 값은 20만원이었다.
우연인지, 그 뒤 폭설로 극장 지붕이 주저앉았다. 지금도 극장 옆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폭격을 맞은 듯 극장 내부 관람석 계단이 훤히 드러난다.
마 사장은 “극장은 내 생애 하이라이트였는데, 이젠 철거할래도 철거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씁쓸해했다.
이광재 기자 jajuy@gjdrea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