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은 회사 이름 갖고, 일방은 정문 차지
1961년 창업 주역들 갈라서 둘로 나뉘어

▲ 1961년 분리 당시 정문을 차지한 일신방직. 대로변에 접한 출입구를 갖게 됐다.

해방 후 성장을 거듭하던 기업, 전남방직공사는 1961년 두 회사로 분리됐다. 전남방직과 일신방직이다. 1951년 적산 불하 후 10년 만이다. 이는 전방을 인수한 컨소시엄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시 컨소시엄엔 미 군정 통역관이었던 김형남(전 숭실대 총장)씨, 포항의 삼일상회 설립자로 대한해운공사 사장을 역임한 김용주씨, 대한제분 창업자인 이한원씨 등 3인이 참여했다.

이른바 `김형남 컨소시엄’인데, 이들이 전남방직공사를 불하받은 게 1951년 11월3일이다. `불하가격은 600여 만 원(현 시세 6억 여원)이었다’고 `전방소사(小史)’는 기록하고 있다.

인수는 했지만, 전남방직공사의 설립 등기는 1년 여가 지난 53년 2월23일에야 완료됐다. 6·25전쟁으로 파괴된 공장을 복구하면서 다른 한 쪽에서는 생산을 계속하는 `쌍끌이’ 재건에 소요된 세월이었다.

재건 후 성장가도를 달리던 전남방직은 창업 주역들의 분열에 직면했다.

광주지역 최대 기업의 분리 역시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된 것이다. 1961년이었다.

현재의 전방은 김용주-김용성 씨 가계의 소유가 됐다. 새로 간판을 단 일신방직은 실질적인 창업주인 김형남 씨의 몫으로 정리됐다.

양사의 분리와 관련 전방 김옥진 총무차장은 “회사 불하 후 김용주 씨는 대외활동에 치중했고, 김형남 씨는 경영에 전념해온 것으로 보인다”면서 “결국 성격이 다른 두 오너가 회사를 반반씩 나눠 분사를 완료한 것 아니겠느냐”고 설명했다.

같은 회사가 분리되면서 방직공장의 모든 것이 둘로 나뉘었다.

우선 종업원이 반반씩 갈렸다. 공장 등 건물도 양분되고, 자로 잰 듯한 경계담장이 쳐졌다.

한 건물이지만 중간에 벽을 쳐 전방과 일방으로 갈라선 건물도 생겼다. 전방측에서 보자면 생산2과, 일신방직측에선 생산1팀의 건물이다.

종업원과 건물이야 산술적인 양분이 어렵지는 않았을 터. 문제는 회사 이름을 누가 가져가느냐였다.

요즘으로 치자면 `브랜드 파워’가 상당했던 `전남방직’이라는 간판은 누구도 포기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양 사는 명분과 실리로 이 문제를 정리했다.

전남방직이란 사명을 포기한 일신방직은 회사의 정문을 차지했다. 대로변에 접한 일신방직 정문과 천변 쪽에 치우친 전방 정문은 이런 타협을 증거하고 있다.

이름은 전방, 정문은 일방의 몫이 된 것이다.

방직회사의 분리는 전방과 일방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주변 공간들도 새로운 간판을 고민해야 했다.

대표적인 곳이 서림교회다.

이 교회는 해방후 미 군정에 의해 공장 관리인으로 파견된 김형남이 종업원의 신앙생활을 위해 설립했다. 

`1946년 2월 10일 둘째 주일 여자기숙사 2층 강당에 10여 명과 함께 첫 예배를 드린 것이 공장교회의 시작이었다.’

`서림교회 60년사’의 기록이다.

당시 교회명은 전방교회였다.

하지만 방직회사가 양분되면서 특정 회사의 이름을 달고 교회를 지속할 수 없게 됐다.

더욱이 전방교회의 설립자인 김형남이 일신방직의 사주가 된 사정은 더더욱 개명을 늦출 수 없게 했다. 결국 바뀐 이름이 서림이었다.

전방은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설립등기 해인 1953년을 창립기념일로 지켜왔다.

하지만 “설립 등기 전 전남방직회사는 우리 뿌리가 아니냐?”는 목소리가 높았다. `전방소사’는 `51년 11월 불하 이후 실제적으로 업무를 수행해 왔고, 단지 준공 지연에 따라 설립등기가 늦은 것이라는 의문이 여전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이런 의문은 결국 창립기념일을 51년 11월3일로 재조정한 근거가 됐다.

`정부로부터 불하 시점을 창립으로 볼 것이냐 아니면 설립등기 시점을 창립으로 볼 것이냐는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나, 불하 이후 설립등기 전이라도 실제적으로 주체적인 경영에 의한 기업활동이 있었다면 전남방직 법인의 발자취는 시작됐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재조정한 창립기념일도 한계는 여전하다. 모태가 됐던 종방(가네보) 시절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는 전방의 역사가 아니냐?”는 물음이 현재도 여전한 까닭이다. 채정희 기자 good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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