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과 금남정맥이 분기하는 주줄산(다른 이름 주화산·568m)에서 호남정맥을 따라 남쪽으로 6㎞ 정도 내려가면 일제 때 만들어진 신작로길, 곰티재가 나오고 곰티재에는 웅치전적비<사진>가 우뚝 서 있다.

 웅치전적비는 임진왜란 때 금산에서 진안을 거쳐 호남의 중심인 전주성으로 향하던 왜군에 맞서 전주성을 지키기 위해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조선의 관군과 의병을 기리고 웅치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1592년 4월 왜군은 조선을 침략하고 개전 20일 만에 파죽지세로 한양을 함락하였다. 이어 6월말 소조천 융경은 호남의 금산지역을 점령하고 용담·진안을 거쳐 전라감영인 전주로 향하기 위해 진안으로 진군한다. 마침내 1592년 7월8일 전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왜군은 진안현에서 웅치로 진격하였으나 김제군수 정담, 나주판관 이복남, 의병장 황박 등의 활약에 큰 타격을 입는다.

 치열한 전투 끝에 비록 웅치전투에서 호남의 관군과 의병이 패하기는 하였지만 왜군의 전력에 큰 손실을 입혀 왜군은 전주성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안덕원에서 조선군에 패하여 후퇴하기에 이른다.

 또한 웅치전투에서 패퇴한 왜군은 7월 말쯤 전력을 보강해 금산에서 진산을 거쳐 전주로 재차 진격을 시도한다. 금남정맥상에 위치한 대둔산의 이치(배티재)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나 광주목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 등의 활약으로 왜군은 크게 패하고 금산으로 물러갔으니 이후 임진왜란 5년 동안 왜군은 전라도를 침략하지 못했으며 호남지역은 조선을 되찾는 토대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금산·진안·무주 등을 제외한 호남정맥과 금남정맥 안쪽의 전라도가 침범을 당하지 않았다.

 웅치와 이치전투 못지않게 임진왜란 때 호남을 방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1·2차에 걸친 진주성 전투이다. 동서를 가로막는 백두대간으로 인해 왜군이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서는 백두대간의 끝자락인 지리산 남쪽의 남해안 지역으로 침공할 수밖에 없다. 바로 진주는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통하는 남해안 지역의 길목으로 전략적 요충지이다.

 그런데 호남지역을 방어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웅치와 이치, 진주성은 지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바로 여기에 지금의 노령산맥이나 소백산맥 같은 산맥개념이 설명할 수 없는 역사의 비밀이 있다. 산경도에 따라 웅치는 호남정맥상에 위치한 진안에서 전주로 들어가는 관문이고, 이치는 금남정맥상의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진주성은 높은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끝나는 남쪽에 위치한 호남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결국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호남정맥과 금남정맥, 백두대간으로 둘러싸인 호남지역이 지켜짐으로써 호남지역을 근거지로 해서 조선의 식량을 보급하고 의병과 관군이 호남 외 지역으로 출병하여 조선을 회복하기 위한 투쟁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산맥 개념인 태백산맥, 소백산맥, 노령산맥으로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조상들의 전통적인 산줄기 인식인 산경도의 백두대간, 호남정맥에는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서려 있다. 우리는 100여 년간 이러한 사실을 잊고 살고 있다.

 한승우 <전북녹색연합 사무국장>

[드림 콕!]네이버 뉴스스탠드에서 광주드림을 구독하세요

저작권자 © 광주드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