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 중 갈무리. `미생’은 `바둑 프로기사’를 꿈꾸다 생존을 위해 치열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은 계약직 평범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회초년생, 계약직 설움 싱크로율 100%
울면서 보게 되는 ‘장그래’의 위로
‘디테일한 자기계발서’라는 점은 한계

 어수룩한 말투와 초점 없는 표정으로 치열한 세상 속에 떠밀린 주인공 ‘장그래’. 2개 국어 이상을 구사하는 화려한 스펙의 동료들과 회사생활을 시작한다. 26년 인생의 대부분을 프로바둑기사만을 목표로 살아가다 입단에 실패한 뒤 한 종합상사의 계약직으로 입사하면서 겪는 생초짜 사회초년생의 이야기, ‘미생’이다.

 개천에서 용 나는 성공담이나 마법 같은 로맨스는 찾아볼 수 없는 평범한 직장이야기 같지만, 바야흐로 ‘미생 열풍’이 일고 있다. ‘미생’은 만화가 윤태호 원작으로 웹툰을 통해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한 뒤 1년 만에 원작 100만 부를 돌파하고 최근 방영되기 시작한 드라마 ‘미생’까지 매회 최고시청률을 경신하며 흥행 중이다.

 ‘미생’은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라는 뜻. 바둑에서 두 집을 만들어야 ‘완생’이 되고, 그 전엔 모두가 ‘미생’으로 불리는 것에서 따온 말이다. 미생의 캐릭터들은 모두 생존을 위해 극심한 경쟁사회에 내몰린 ‘노동자’라는 측면에서 살아있어도 살아있지 못한, 주체로 설 수 없는 수많은 ‘을’을 대변하고 있다.

 

“이것은 다큐”, 냉혹한 현실 담은 프레임

 

 하루하루가 불안한 계약직 직원 장그래의 시점을 통해 번잡한 출근길부터 야근·회식으로 이어지는 직장생활의 리얼리티가 숨 막히게 묘사된다. 장그래가 인턴PT를 준비하고 발표하는 장면, 딱풀 하나 때문에 서류유출 소동이 벌어지는 장면 등 실제 직장 업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세세하게 담아냈다는 점에서 ‘미생’은 만화가 아니라 ‘다큐’라는 평이 나올 정도.

 여기에 ‘미생’ 속 다양한 캐릭터들은 공감의 깊이를 더한다. 만년과장부터, 워킹맘으로 대변되는 여자 상사, 20대 인턴 등 직장에서 반드시 마주칠 수밖에 없는 인물이 냉혹한 현실 속에 뒤섞여있다. 어느 중소기업 임원은 “지난 30년간 회사생활을 하며 만났던 사람이 이 만화에 다 나온다”며 ‘미생’ 후기를 적기도 했다.

 살벌한 조직풍경 내에 존재하는 미묘한 ‘인간관계’도 탁월하게 묘사된다. 기업이라는 거대한 조직 속 부속품처럼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들이지만, 결국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는 곳도 이 조직 내의 ‘관계’다. 장그래가 업무 실수로 상사에게 혼이 날 때 등을 토닥이며 지나가는 선배가 있고, 동료와 대립하게 될 때 반드시 먼저 손을 내미는 이가 있다.

 

 평범한 ‘을’에게 위로가 되는 것들

 

 ‘미생’은 냉혹함 속에서 피어나는 동료애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제시하고 있다. 무안할 정도로 핀잔을 주던 상사도 집에 토끼 같은 자식들이 기다리는 아버지고, 완벽하게만 보이는 커리어우먼은 아이를 맡기지 못해 쩔쩔매는 엄마라는 사실은 모두 갑의 위치와는 무관한 사람들의 일상을 일깨운다. 디테일한 묘사와 소소한 감동이 ‘미생’에 생명을 불어넣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미생’이 마음을 달래주는 데 그쳤다면, ‘셀러리맨의 교과서’라는 별칭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회를 거듭할수록 성실함과 특유의 통찰력으로 직장생활에 적응해 가는 장그래를 보게 되는 것. 직장생활에서 어려운 국면에 처할 때마다 장그래가 가장 잘 아는 바둑의 수읽기와 버무려지며 마음에 새길만한 ‘격언’을 남긴다.

 

영영 ‘NO’를 외칠 수 없는 슬픈 자화상

 

 하지만 그것이 ‘미생’이 지니는 한계이기도 하다. 꿈을 져버리고 생존경쟁에 뛰어든 주인공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개인의 역량을 키워나가는 수밖에 없다. 거대한 기업 내 작은 부서, 그 중에서도 계약직 직원으로 살아가는 일은 현실을 인정하고, 적응해나가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미생’에서 정의내리는 노동은 ‘한 개인이 기업에 최적화되는 과정’을 의미하고 있고, 대부분 ‘을’인 직원들은 이를 바꿀 수 있는 힘이 없다는 사실을 디테일한 감동으로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현실 속의 계약직들이 장그래 보다 게으르고, 열정이 없기 때문에 조직 내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구조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 불가능에 가까울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엄격하게만 보이던 오 과장이 장그래에게 위로를 건네는 장면으로 해결될 수 있는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주인공 장그래의 이름이 ‘그래’인 것도 영영 ‘NO’를 외칠 수 없는 ‘을’의 슬픈 자화상을 담았다는 뜻이겠다.

김우리 기자 ur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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