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주말마다 짬을 내서 하는 일은 지역의 초기 여성농민들의 삶의 이야기를 인터뷰하는 것이다. 삶에 대한 예우랄까, 내가 왜 이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이 분들의 삶에 대한 가장 정당한 예우가 이분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남기는 것이라는 나의 신념 때문인 것 같다.

 요즘 만났던 분들은 전북에서 터를 잡고 계시는 소위 ‘학출’인 여성 농민 분들이었다. 70년대 대학을 나와 농민운동에 투신하여 시골 총각과 결혼하고 농민회 조직과 여성농민회 조직을 이끌고 수십 년을 사셨던 분들이었다. 사실 인터뷰 기획 단계에서는 여성농민회 조직에 더 관심이 많았다. 마치 여성농민회 안에 자매애가 넘치고 유토피아를 구현한 그곳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실제 인터뷰 내용은 상처, 아픔, 고통 투성이었다.

 정말 신기한 것은 어려운 생계와 끝이 없는 빚잔치, 고된 시집살이, 남편의 폭력, 자식 문제 등 그 어렵던 삶의 이야기들을 그냥 담담하게 말씀하시던 분들이 “농민운동, 이 농민운동을 내가 내 인생 끝까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더 이상 말씀을 잇지 못하시는 것이었다. 왜 자기 인생을 그 힘든 곳에 스스로 밀어 넣었으면서 그리고 그렇게 싸울 만큼 싸우고, 버틸 만큼 버티고 혼신의 힘을 다해 사셨으면서,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하게 하고 울컥하게 하고 눈에서 눈물을 쏟게 하는 저 역사적 부채감은 도대체 무엇일까.

 가장 최근에 인터뷰를 했던 한 분은 요근래 농민회 간부를 맡았다면서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나에게 농민회 일을 맡으라고 하길래 겉으로 티는 못 냈지만 속으로는 너무 좋았어.” 아무도 돌보지 않는 한물 간(?) 농민회 일거리가 저리도 좋으실까. “어떻게 그런 삶을 사셨어요. 어떻게요?” 자꾸만 어떻게를 연신 물어보는 나에게 그분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마 넌 이해 못 할 거야. 이건 일종의 신앙이고 믿음이야.”

 역사적 변혁이라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던지고 아직도 그 철저하지 못했던 자신의 운동적 삶에 울컥하시는 이분들 덕분에 그래도 한 걸음씩 우리 사회가 민주와 정의를 향해 다가간 것은 아닐까.

이선<경제문화공동체 더함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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