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구라행진’부터 차별철폐위한 점거까지
광주장애인종합복지관 30주년 세미나
광주 나병원에서부터 광주장애인복지관까지

▲ 지난 21일 광주시의회 예산결산위원회실에서 `한번쯤, 광주지역 장애인복지를 톺아보다’를 주제로 광주장애인종합복지관 개관 30주년 기획 세미나가 열렸다.
 #1933년 광주. 한센병자 150여 명과 의료진·선교사 등이 우마차에 가재도구를 싣고 긴 행렬을 이루어 행진을 시작한다. 지금의 국도 1호선인 신작로를 따라 장성을 거쳐 정읍-완주-익산-논산-대전-천안-평택-수원-남태령을 거쳐 서울 조선 총독부정문까지 이르는 길을 행진해 간 것이다. 11일 만에 총독부 정문에 도착한 이들은 ‘문둥이’(나환자)들의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며 7시간 연좌시위를 벌였다. 당시 소식을 듣고 전국에서 모인 한센병자는 510여 명이었다. 이른 바 ‘구라행진(求癩行進)’. 오방 최흥종 목사와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간호사인 서서평 선교사가 한센병자 150여명과 함께 비인도적인 단종(거세)을 폐지하고, 적절한 치료와 자활을 위한 공간을 요구하기 위해 광주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행진을 하고 결국 요구를 쟁취한다.

 #그리고 2001년 광주, 60여 명의 장애인과 자원봉사자들이 당시 시청(동구 계림동)에서 광천터미널까지 2시간에 걸쳐 행진을 벌인 후 광천터미널 앞 도로를 무단횡단한다. 아니 목숨을 건 도로 횡단이 시작됐다. 이 땅에서 장애인들이 이동하기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몸소 보여주겠다고 나선 이들이었다. 광주지역에서 벌어진 장애인 당사자들의 거의 최초의 공동행동이었다. 이날 무당횡단은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신호탄이 됐다.
 
▲목숨을 건 횡단, 1933년과 2001년
 
 1933년과 2001년 그리고 2018년까지…지역 장애인 인권 및 복지를 둘러싸고 많은 일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여기에 도달했고 또 나아갈 예정이다. 광주지역 장애인 복지 역사를 돌아보고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할 것인지 고민해보는 자리가 지난 21일 광주장애인종합복지관과 (사)실로암사람들 주관으로 광주시의회 예산결산위원회실에서 열렸다.

 광주장애인종합복지관 개관 30주년 기획 세미나가 ‘한번쯤, 광주지역 장애인복지를 톺아보다’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이날 세미나에선 주제처럼 광주지역에서 최초로 한센병 환자를 치료했던 1909년부터 현재 다양한 복지시설과 장애인 인권을 위한 여러 활동들까지 돌아보는 시간이 이어졌다.

 첫 발제자로 나선 광주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이용교 교수는 “우리나라 사회복지 역사에서 광주가 ‘복지성지’로 우뚝 선 것은 1909년부터 ‘나병환자’를 품었기 때문”이라면서 “당시 문둥이, 문둥병자, 나환자, 나병환자 등으로 불리며 ‘천형(天刑)의 병’으로 알려진 한센병자를 광주가 끌어안았다”고 밝혔다. 이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1909년 4월 쌀쌀한 봄날, 지역 선교활동을 하던 오웬(제중원 의사)이 급성폐렴으로 위기를 맞자 목포에서 활동하는 포사이트의 왕진을 청했다. 그는 영산포에서 남평을 거쳐 광주로 오는 길에 방치된 여성 나환자 한명을 나귀(혹은 말)에 태워왔다. 포사이트가 도착할 때에는 오웬은 이미 죽음을 맞이했는데, 바로 그 침상에서 나병으로 죽음을 앞둔 조선 여인이 서양식 치료를 받았다. 그 나환자는 제중원 환자들의 반대로 병원 옆에 있는 벽돌을 굽던 ‘가마’에서 치료를 받고 일주일 정도 살다 사망했다. 나환자는 죽었지만, “광주에 가면 양코배기들이 나환자를 치료해준다.…”는 소문은 전국에 퍼져서 나환자들이 광주로 몰려들었다.
 
▲110년간 광주 장애인 복지 개관
 
 1910년에 광주 시내에 사는 인구가 약 1만 명이었는데, 나환자가 500명 이상이었다고 전해진다. 늘어난 나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1912년(1911년이란 설도 있음)에 봉선동에 ‘광주나병원’이 개원한다. 독립운동과 나환자 치료에 일생을 받쳤던 최홍종 목사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광주 봉선동의 땅 1000평을 무상으로 기증해 이뤄졌다.

 이 교수는 ‘구라운동’에 대해서도 “1963년에 마틴 루터킹 목사를 비롯한 흑인들이 참정권 쟁취운동을 하기 위해 워싱턴 대행진을 한 해보다 30년이나 앞섰다”면서 “워싱턴 대행진은 미국 국민인 흑인들이 ‘참정권’운동을 한 것이지만 구라행진은 식민지 주민 중에서도 가장 사회적 지위가 낮은 ‘문둥이’(나환자)들이 인간다운 삶을 요구한 ‘인권운동’이고 성공한 ‘복지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대단히 크다”고 평했다.

 이날 발제에서 이 교수는 현재에 이어지고 있는 소규모 보호와 자립생활 및 인권운동까지 지난 110년 간 광주 장애인 복지를 개관하는 내용을 전했다.

 이어 발제에 나선 실로암 사람들 김용목 대표는 진보적 장애인 단체를 중심으로 한 광주지역 장애인단체 운동을 돌아봤다. 지난 2001년 광주지역에서는 처음 일어난 이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공동행동을 시작으로 2002년 광주지역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공동기획단이 조직되고 시내버스타기 투쟁, 광주우체국 앞 결의대회 등이 벌여졌다. 동정과 시혜 및 관리 대상이 아닌, 장애인 권리의 문제이고 차별의 문제임을 선언하는 과정이었다. 2005년 광주장애인차별철폐연대로 명칭을 바꾸고 본격적인 장애인 차별철폐 운동이 벌어졌다. 철폐연대는 저상버스 도입, 특별교통수단 확충, 시외저상버스 도입, 24시간 활동보조서비스 도입 등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투쟁을 벌였다.
 
▲“진보적 운동단체들과 연대 강화”

 김 대표는 장애인 이동권·교육권·노동권·주거권 등 기본적인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진행해왔던 지난 10여 년간의 활동들을 전하며 △진보적 사회운동단체들과의 연대강화 △다양한 인권영역에 대한 운동 강화 △장애인 당사자가 주체로 서는 운동 △장애인 당사자 정책참여 제도화 등을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제시했다.

 이밖에 이날 세미나에선 광주여성장애인연대 강경화 부대표가 광주여성장애인연대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중 차별을 받고 있는 여성 장애인 권익신장을 위한 역사화 활동 그리고 과제 등을 전했고 광주지적발달장애인복지협회 노미향 대표가 다른 장애인과 처한 현실이 다를 수밖에 없는 발달장애인의 복지환경의 어려움과 과제 등에 대해 발표했다.

 끝으로 근육장애인협회 장익선 활동가는 스스로 근육장애인으로 24시간 활동보조 없이는 일상생활이 힘든 자신의 경험을 전하고 “10년 후의 광주 복지는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희생되는 장애인이 없기를, 누군가에게는 일상적인 일이 장애인에게는 특별한 일이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면서 “무엇보다 동정과 시혜를 넘어 권리로서의 복지가 실현됐으면 한다”고 제언했다.
황해윤 기자 nab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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