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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고전을 만나다]푸른 하늘 ‘네모의 꿈’ & 조지 오웰 ‘1984’
편입에의 욕망과 자유에의 갈망
박혜진
기사 게재일 : 2019-12-02 06:05:02
▲ 골콩드, 마그리트.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 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네모난 조간신문 본 뒤
 네모난 책가방에 네모난 책들을 넣고
 네모난 버스를 타고 네모난 건물 지나
 네모난 학교에 들어서면
 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칠판과 책상들
 네모난 오디오 네모난 컴퓨터 TV
 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루를
 의식도 못한 채로 그냥 숨만 쉬고 있는 걸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구는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 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
 
▲1984년 그리고 2019년
 
 1984년의 아이들은 골목에서, 길모퉁이가 시작되는 가게 앞 조막만한 공터에서, 함께 뛰어 놀았다. 저녁이면 아이들을 지켜주는 건 가족이었지만, 밝은 한낮 아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지켜보고 지켜주었다. 도시의 밤도 시골의 밤도 아이를 부르는 소리로 깨어나고 잠이 들었다. 2019년의 길목들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제 아이들은 뛰지 않는다. 아파트 담장 옆에 붙어 학원차를 기다리는 올망졸망한 아이들은 웃지 않는다. 핸드폰 속으로, 자기만의 공간속으로 깊이 가라앉아 있다. 그렇게 같이 그러나 따로 있는 아이들을 보다가 문득 ‘1984’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아침이면 저절로 울리는 텔레스크린에 의해 일어나고, 텔레스크린을 보며 밥을 먹고 텔레스크린이 보여주는 화면에 울고 웃으며, 텔레스크린의 의식이 곧 자아와 전체의 의식이 된 저 가상의 미래 세계가.

 저널리스트들에게 존경받는 20세기 작가 조지 오웰은 가상의 오세아니아를 배경으로 전체주의적 미래사회를 경고하는 대작 ‘1984’를 썼다. 책이 출판된 1949년은 2차 세계대전의 여파가 냉전으로 이어진 시기, 아메리카와 유럽은 흔들리는 인간 이성에 대한 불신을 바로 세우고 그 이성이 창조해낸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수호할 하나의 대안으로 조지 오웰의 작품에 열광했다. 서구 열강이 대척점에 놓았던 ‘반스탈린주의’와 ‘반나치주의’를 가장 처절한 형태로, 한줌 희망도 없이 묘사한 책으로 ‘1984’가 읽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984년의 가상 제국 오세아니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세 개의 연합으로 나뉜 대륙들은 상시적 전쟁상태이며 조장된 위기 속에서 권력은 비판의 화살을 피하고 영구한 통치권을 획득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당의 슬로건 아래 오늘의 밥과 내일의 안위, 차이를 불신과 의혹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뭇 시선까지 걱정해야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알기를 원하지 않으며 질문하고 의혹하기를 그친다.

 통치 체계는 그에 걸 맞는 통치의 수단을 가진다. 가령 오세아니아 당은 사람이 거주할만한 곳이면 어디에나 송수신 장치인 텔레스크린을 설치해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엿보고 감시하며 기록한다. 시시때때로 배덕자와 역모자를 만들어 자유가 억압된 사람들의 무의식적 분노와 증오를 쏟아내는 배출구로 삼고, 역사를 지우거나 왜곡하기 위한 도구로 신어(新語)를 만들었다. 신어의 정체는 주인공 윈스턴에게 오브라이언이 던지는 말에 들어있다.
 
 윈스턴, 자네는 신어를 만드는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데 있다는 걸 모르나? 결국 우리는 사상죄를 범하는 것도 철저히 불가능하게 만들 걸세. 그건 사상에 관련된 말 자체를 없애버리면 되니까 간단하네. 앞으로 필요한 모든 개념은 정확히 한 낱말로 표현될 것이고, 그 뜻은 엄격하게 제한되며 다른 보조적인 뜻은 제거되어 잊히게 될 걸세.
- ‘1984’중
 
▲사유가 마비되는 곳에서 부활
 
 감정과 생각은 머릿속에서 언어로 이미지화되고 언어로 드러나기에 사용할 수 있는 낱말이 빈약하면 사고 체계도 빈약해진다. 먹고 자고 배설하는 욕구는 남되, 정신은 마비되고 비판은 사라지며 의식은 단순화한다. 문자의 축소는 정신의 축소이므로, 언어를 갖지 못한 사람은 혹은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의 수가 제한된 사람은 주입되거나 노출되는 정보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다섯 살 아이가, 장난감을 손에 쥐고 웃는 유튜브 화면 속 아이를 보며, 자신의 행복이 그 장난감 하나에 몽땅 달렸다고 믿게 되는 건 화면과 등치해 달리 대체할 수 있는 표상과 언어가 아이에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디 저 가상의 오세아니아 만이랴. 손가락 하나로 터치하면 휙휙 화면이 바뀌는 핸드폰의 터치스크린과 무수한 채널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감각적인 영상들과, 10초마다 웃겨주는 과잉의 액션과 말투에 익숙해진 아이들은 호흡이 긴 책을 답답해하고 따분해한다. 직접적이고 사실적인 설명, 쉽고 명쾌한 정보는 선호하되 행간의 의미를 읽기위해 주저하며 빤히 들여다보아야 의미가 다가오는 고전은 고대의 유물이거나 이미 죽어버린 사어쯤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낱말이 있는 목적은 사물과 사건을 그대로 재현하는 1:1 대응에 있지 않다. 만약 언어의 목적이 오직 재현뿐이라면 언어를 통한 새로움과 변화를 꾀할 수도, 꾀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사유를 위한 말들을 삭제하고 오직 사물을 지칭하는 재현을 위한 언어만을 남겨 개별 인간을 거대한 시스템에 부합하는 존재로 개조하려던 당의 원수 ‘빅브라더’의 계획은 성공했다. 그리하여 사랑과 자유를 갈망하던, 남몰래 일기를 쓰며 ‘이 모든 것은 어쩌면 허상이 아닐까?’ 사유하던 윈스턴은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 ‘빅 브라더’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

 ‘1984’를 공산주의 비판이라는 독법으로만 읽는다면 그야말로 실패한 독법이다. 잘 표현된 텍스트는 읽는 자의 독법과 독자가 처한 시대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독해된다. 한 권의 책이 100년-1000년을 뛰어넘어 거듭 부활하는 건 텍스트에 당대를 뛰어넘는 무엇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조지 오웰.

 심리학자라면 그 무엇의 정체를 태곳적 인류가 진화해오는 동안 인간 개개인의 마음에 응축된 ‘집단적 무의식’의 구현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른다.

 실존주의자라면 그 무엇을 존재자의 ‘존재하려는 갈망’ 혹은 ‘자유에의 의지’라고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1984’에는 반공방첩만으로는 해석되지 않는 거대한 깊이의 디스토피아적 절망이, 그리고 디스토피아를 목도한 후로도 한동안 가시지 않는 우리의 경악이 켜켜이 집약돼 있다.

 그리고 1984년은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사유가 마비되는 곳에, 오직 하나의 길을 진리로 좆는 사회의 질서 속에, 아무것도 궁금해 하지 않으며 위에서 아래로 학습되고 복제되는 세계관 속에, 우리의 의식 안에서 매번 부화하며 매일 부활한다.
 
▲끝끝내 의심하라
 
 구글 신이라고 했던가. 무엇이든 물으면 답해주는, 손가락들이 터치한 횟수만큼의 데이터를 모아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책과 의류 등 각종 구매목록을 화면에 띄워주는 모니터 속에서 내 의지는 너무도 쉽게 길을 잃는다.

 현대판 빅브라더가 제공하는 텔레스크린은 감시가 아닌 유혹이며 무한한 선택의 자유를 약속하는 마녀 키르케의 섬이다. 먹으면 고통을 잊고 취하게 만드는 키르케의 연꽃열매처럼, 친절한 정보 제공과 빠른 검색엔진에 감탄하며 터치스크린 안에서 쉽게 얻은 지식들을 서핑 하는 동안 생각은 우유부단한 충동에 자리를 내어주고 의식적 사유는 불분명한 기분들로 흐려진다. 나의 취향과 나의 편향은 어디에 있는가. 나의 의심과 회의는 어디로 갔는가. 인간보다 훨씬 인간적인 스크린 앞에서, 그것이 가진 진정성이란 ‘수익’과 ‘좋아요’를 향한 갈망이라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오늘도 잊고서.

 문득 떠오르는 성서의 한 장면. 십자가에서 죽은 후 부활해 돌아온 예수를 본 열두 제자 중 오직 도마만이 증거를 보여주십사 예수께 아뢰었다던가. 그러자 예수는 도마로 하여금 로마 병정의 창끝에 찔렸던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 더듬게 하신다. 성경은 의심 많은 도마를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으나, 자신의 의심을 믿음 부족으로 돌려 숨기지 않고 “당신이 정녕 예수냐”고 물었던 도마야말로 내게는 앎을 구한 사람으로 비친다.

 그러니 나의 습(習)으로 이미 와있는 것들의 정체와 의미를 다시 묻지 않는다면, 무거운 관성이 나를 지배하리라. 이성의 하늘은 열리지 않고 무지의 중력이 나를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리. 이끌려 사는 것과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사는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르지 않을지 모르지만 전자와 후자의 추동력과 자존은 결코 한끝 차이가 아니다. 둘 사이의 거리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러니 끝끝내 의심하라.
박혜진<문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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