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 원본.
 올해 5·18이 더욱 뜨거웠던 이유는, 오해와 박해 속에서 폄훼돼온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념식에서 제창할 수 있어서만은 아니다.

 노래에 스며든 민중의 서러운 역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게 됐다는 해방감으로 분출된 열기가 가득했어서였다.

 특히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자리를 찾음으로써 5·18민중항쟁의 역사가 진실에 더 다가설 것이라는 기대감이 오월 광주를 가슴 뛰게 했다.

 그래서 지난 열흘 간 5·18을 떠올리는 곳에선 어김없이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한 번으론 부족해서 부르고 또 불렀다. 억눌렸던 시간만큼 더욱 힘차고 뜨겁게 토해낸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2일 제37주년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토록 주무 부처인 국가보훈처에 지시했다. 제창이 불허된 지 9년 만에 원상회복이었다.

 희소식에 광주는 열광했다. 5·18전야제가 열린 17일 저녁 금남로에선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축제가 벌어졌다. 전야제의 시작과 끝을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장식했지만, 37년 간의 갈증은 채워지지 않았다.

 노래는 민주대행진에 나선 오월어머니들, 5월 단체 회원들, 세월호 유가족들이 금남로에 입성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계속됐다. 이후 전야제 무대 위에서 펼쳐진 공연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다채롭게 변주되며 구슬프게, 혹은 희망차게 시민들을 어루만져줬다.

 다음날 국립5·18묘지에서 열린 5·18 기념식은 임을 위한 행진곡이 새 역사의 변곡점이 됐다. 대통령 기념사와 기념공연 등으로 꽉 채워진 기념식에서 “9년 만에 다 함께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전파를 타면서 5·18은 더 이상 `광주’만의 것이 아니게 됐다.

 문 대통령은 이날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작곡한 김종률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 등 내빈과 함께 손을 잡고 노래를 제창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들불야학’ 후배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계기로 1982년 탄생한 노래다. 소설가 황석영이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옥중 장편시 `묏비나리’를 개작하고 김 사무처장이 곡을 입혔다.

 이듬해부터 30여 년 간 5·18 기념식과 투쟁 현장 등에서 애창됐지만, 전두환 정권 때는 금지곡이 됐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종북 논란에 휘말리면서 기념식에서 제창이 아닌 합창으로 격하돼 온 것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반기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래가 억압받는 정권 하에서 5·18 역사에 대한 왜곡·폄훼 역시 확대 재생산되며 진실을 가려왔기 때문이다.

 5·18 이후 광주시의회가 본회의 개회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공식 의사 일정으로 본회의장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되기는 1991년 6월 개원 이래 이번이 처음이다.

 광주 관내 초·중·고에서는 5·18기념주간을 맞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배우고 제창하는 시간을 갖는 등 노래와 친숙해지기 위한 활동에 참여했다.

 산꼭대기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이 불렸다. 19일에는 셰르파와 함께 세계 제4위 고봉 로체(Lhotse·8516m) 정상에 오른 산악인 김홍빈 대장은 서 있기조차 힘든 상황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른 영상을 공개했다.

 5·18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등반일을 18일로 잡은 김 대장은 이번 산행을 통해 장애인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8000m급 10개봉에 오르는 대기록을 세우게 됐다.

김우리 기자 ur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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