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당시 전남경찰국장 8쪽 분량 자필 ‘비망록’ 공개
박관현 ‘촛불 시위’ 요청·경찰 철수 도운 시민들 회고

▲ 고 안병하 치안감 유족이 10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기증한 비망록과 안 치안감 관련 사진들. 안 치안감은 자필로 남긴 비망록에서 5·18 발생 원인으로 신군부의 과격진압을 꼽았다.
“5월22일 도청 앞에서 군의 과격한 진압에 항의하던 국과장이 군인에게 구타당함.”

5·18민중항쟁 당시 전두환 신군부의 발포명령을 거부한 고 안병하 치안감(당시 전남경찰국장)이 죽기 전 자필로 남긴 비망록이 10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안 치안감의 유족 전임순 여사와 셋째 아들 안호재 씨는 이날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비망록을 비롯해 치안감 추서 계급장·임명장, 안 치안감 사진 자료 등을 기증했다.

비망록은 안 치안감이 한자를 섞어 직접 작성한 것으로 총 8쪽 분량이다.

전남경찰국장으로 일한 시기(1979년 2월20일~1980년 5월24일)와 이때 겪은 5·18과 관련해 직접 겪은 경험과 사실 등이 꼼꼼히 적혀있다.

1980년 3월 새학기 시작과 함께 전국 대학에서 계엄령 철폐, 군부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확산되면서 5월3일과 5월9일 전남대, 조선대에서 학생 시위가 벌어진 내용과 함께 5월14일과 5월15일 전남대생 등 2300명이 교내 시위를 벌였다고 전했다.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고 박관현 열사와의 일화도 적혀 있었다.
“5월16일 전남대 학생 회장이 정보과장 안내로 본인(안 치안감)을 방문해 책임지고 야간 촛불 시위를 하겠다고 허락해 달라고 하기에 ‘안 된다’고 하자, 학생 회장(박관현)이 허락하지 않으면 오히려 사고가 발생할 것이라고 하기에 본인 단독으로 (시위를)허락해 주었다.”

이 시위가 아무 사고 없이 평화롭게 진행됐다는 내용도 이어졌다.

안 치안감은 “5월16일까지 광주와 전남지역의 학생시위는 타 시도에 비해 평온한 편”임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5월17일 계엄령 선포와 함께 군이 투입되면서 사태가 급속히 악화됐다고 지적했다.

비망록 중 특히 눈여겨 볼 대목이 ‘광주사태 발생동기’다.

전남경찰국장으로 있으면서 직접 본 현장 상황을 토대로 안 치안감이 5·18 발생 원인을 판단한 것이다.

안 치안감이 우선적으로 꼽은 원인은 ‘과격한 진압으로 인한 유혈사태로 시민 자극’이었다. 또 ‘악성 유언비어 유포’와 ‘김대중 씨 구속’ 등으로 시민들을 자극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와 관련해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나의갑 관장은 “당시 공수부대 안에는 여단 사령부에 심리전 요원들이 있었다”며 “이들이 시위 군중 틈에 끼어들어 유언비어를 만들고 자극한 것이 5·18의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안 치안감 비망록 내용도 이를 지적한 것이다”고 강조했다.

5월21일 도청에서 경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광주기동대 중대가 시민군에 포함됐다가 경찰임이 확인돼 충돌없이 철수했고, 오히려 시위를 하던 군중이 경찰임을 확인하고 사복을 가져다 주는 등 철수하는 경찰들을 보호해 “무사히 철수했다”는 회고도 비망록에 적혀 있었다.

이날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서 어머니 전임순 여사와 기자회견을 가진 안 치안감의 셋째 아들 안호재 씨는 “1988년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집을 정리하다 장롱 밑 깊숙한 곳에서 자필 메모를 발견했다”며 “몰래 쓰신 걸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으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작성 시기에 대해선 “88년 광주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 요구를 받으셨는데, 아마 그때 쓴 걸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한편, 고 안병하 치안감은 1980년 5·18 당시 발포명령을 거부해 5월25일 직위해제를 당하고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8일간 고문을 받았다. 이후 6일 강제사직을 당하고 고문후유증으로 8년간 투병생활을 하다 1988년 10월10일 세상을 떠났다.
강경남 기자 kkn@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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