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 7~9월 노동자 대투쟁

▲ 1987년 8월19일 울산 거리를 가득 메운 현대 7개 노조 노동자들.<사진 출처=‘1985-87년 개헌 대선국면과 민중운동-미완의 87년이 2017년 촛불에 주는 교훈’>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열망으로 뜨거웠던 1987년. 민주화에 대한 시민들의 열망으로 6월 해방공간이 열렸다. 하지만 기만적인 6·29선언으로 역사의 주체로 등장했던 시민들은 빠르게 무대 밖으로 퇴장했다. 타도 대상이었던 집권군부세력이 개헌협상의 주체로 탈바꿈했다. 직선제를 쟁취했지만 노동자들의 현실은 달라진 게 없었다. 시민들이 사라진 해방공간에 억압받았던 노동자들이 대거 진출했다. 87년 항쟁은 끝난 게 아니었다. 군사정권의 노동통제와 탄압에 숨죽여 있던 노동자들은 “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구호를 들고 9월까지 위력적인 투쟁을 전개한다.
 
▲ “노동자도 인간이다” 7~9월 3000여건 쟁의

 사회운동단체 ‘사회진보연대’가 발간한 보고서 ‘1985-87년 개헌 대선국면과 민중운동-미완의 87년이 2017년 촛불에 주는 교훈’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7월5일 현대엔진 노조 결성을 계기로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 민주노조쟁취투쟁으로 확대되고 ‘현대그룹노조협의회’ 결성으로 모아진다. 8월 중순에는 현대그룹 6개 사업장 4만 노동자들이 중장비로 무장한 대규모 가두시위와 행진을 통해 경찰의 최루탄 난사를 무력화시킨다. 8월 초순부터 말까진 파업투쟁이 정점에 이른다. 울산의 투쟁은 부산과 창원으로 확산되고, 사실상 총파업과 같은 기세로 발전한다. 업종별로는 섬유·전자로, 지역으로는 경남지역에서 경북·구미·경인지역으로, 규모면에서는 재벌계열사에서 중소기업체로 빠르게 번져 간다.

 이렇게 7월부터 9월 중순까지 3311건의 쟁의가 발생한다. 하루 평균 40여 건의 파업이 매일 새롭게 발생했다. 쟁의에 참여한 노동자 수는 당시 10인 이상 상용근로자 333만 명의 약 37%인 122만 명에 달한다. 3개월 간 연인원 200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거리에서‘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쳤다. 그 결과 노동조합의 수는 2658개에서 6142개로 증가했고 조합원 수는 170만 7000여 명(1988년 조직률 22%)로 증가했다.

 7월부터 8월까지 정점에 이르렀던 노동자대투쟁은 9월부터 정권으로부터 강력한 탄압을 받기 시작하고 급속도로 위축된다.
 
▲노동자 이석규 열사 최루탄 직격 사망

 6월항쟁으로 이어진 사회분위기로 강하게 나서지 못했던 정권은 8월말 9월부터 노동자들을 용공좌경 세력으로 갈라치기 하면서 강압적으로 억눌렀다. 그 과정에서 8월22일 가두시위를 벌이던 대우조선 스물한 살 노동자 이석규 열사가 경찰의 최루탄에 직격으로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1966년 전북 남원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이석규 열사는 중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 직업훈련원에서 1년간 배우고 병역의 의무를 위해 방위산업체인 대우조선에 취직해 억척스럽게 일했던 젊은 노동자였다. 경찰은 22일 옥포아파트 사거리에서 스크럼을 짜고 앉은걸음으로 시위를 하는 노동자들에게 직격 최루탄을 난사했고, 백골단은 흩어지는 시위대를 골목 구석까지 쫓아가서 짓밟고 옷을 발가벗기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 이 와중에 이석규 열사가 직격최루탄을 맞고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운명한다.

 경찰은 이석규 열사의 장례식도 강경하게 탄압했다. 8월28일, 노동자·지역주민 등 2만여 명의 애도 속에 대우조선 운동장에서 영결식이 거행된다. 노제를 지낸 뒤, 영구차를 앞세우고 망월동 묘지로 향하는 과정에서 전두환 정권은 시신을 탈취한다. 주변 야산에 잠복하고 있던 2500여 명의 전경과 백골단이 몰려나와 장례집행위원 등 재야인사들의 차와 동문인 광주직업훈련원 출신들이 타고 있던 버스 창문을 박살내고 이들을 집단구타하며 강제 연행한다. 이어 경찰은 유족 3명만을 태우고 남원 선산에 가 열사의 시신을 매장한다. 전두환 정권은 이날 전국적으로 개최된 추모제와 관련하여 933명을 연행했고, 이 가운데 64명을 구속했으며, 이소선 등 10여 명을 수배한다. 또 대우조선에서는 해고된 3명 외에 추가로 7명에게 몰래 잠입한 형사계장을 구타했다는 혐의로 살인미수죄를 적용해 구속한다.(‘1985-87년 개헌 대선국면과 민중운동-미완의 87년이 2017년 촛불에 주는 교훈’)
 
▲87년 항쟁 성과로 민주노총 탄생

 8월 28일 이석규 장례식에 대해 경찰이 강경 탄압으로 나오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은 급속히 위축됐다. 9월4일에는 대우자동차와 현대중공업 파업 농성장에 경찰을 투입해 대우자동차 95명, 현대중공업 40명을 구속하기도 했다. 당시 언론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좌경 용공’ ‘불순 세력’ ‘악성 분규’ 등의 딱지를 붙였다.

 노동자들은 국가의 폭력적 탄압 및 용공좌경 척결공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87년 항쟁은 끝이 났다. 하지만 완전한 끝은 아니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서 수많은 노동자들은 자신의 사업장의 담벼락을 넘어서 지역별 노동조합협의회를 만들고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과 전국업종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를 건설했다. 이 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1995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만들어졌다.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촛불로 정권을 교체한 지금도 여전히 노동자들은 탄압받는다. 1년 먼저 촛불을 들었던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은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다. 여전히 노동자들은 노조할 자유, 파업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우리가 1987년을 되돌아 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미완의 혁명’이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황해윤 기자 nab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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