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의 ‘모공편’에서는 군주가 군대에 해를 끼치는 세 가지 경우를 말한다. 전쟁을 모르면서 터무니없이 지휘를 하는 경우가 그 첫째이고, 군대 안에서의 사무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관리를 간섭하는 경우가 둘째이며, 각급 군관들의 권한과 능력을 알지도 못하면서 인사에 개입하는 경우가 셋째이다. 이는 군주가 전쟁과 군사 사무에 대해 통달하고 군관들의 능력까지도 세세하게 알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장수가 소신껏 싸우도록 군주가 그를 신뢰하고 밀어주어야 한다고 손자는 생각했다. ‘명심보감’에서 말하듯 의심나면 쓰지 말고, 일단 썼으면 의심하지 말라는 말이다. 고전 연구가인 임건순은 수양제의 고구려 1차 침입을 그 좋은 예로 든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유명한 이 전쟁에서, 수양제는 전투를 장수들에게 맡기지 않고 일일이 간섭했다. 이를 간파한 고구려 군대는 일부러 평안도 깊숙이 수나라 군대를 유인해 황제를 전장에서 되도록 멀어지게 했고, 그 길을 전령이 숱하게 오고가는 사이에 시간을 벌어 황제의 명령을 쓸모없게 만들어버렸다. 백만대군을 이끌고 원정에 나선 수양제는 결국 엄청난 물자를 길거리에 낭비한 채 살수에서 30만 대군을 몰살당하고 전쟁을 끝맺어야 했다. 한 사람의 독선이 세계 최강의 제국 군대조차 손발을 묶어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누구를 위한, 무엇의 혁신인가?
 
 길 도(道)라는 한자는 무당이 적군의 수급을 들고 군사를 이끄는 모습에서 따왔다고 한다. 산가지로 점을 쳐서 진군을 결정하던 춘추말기에, 손자는 군대를 합리적으로 경영함으로써 오나라를 강국으로 만들었다. 손자병법에는 다양한 전략과 전술이 거론돼 있지만, 군주와 장수, 병졸들이 제 각기 맡은 바 역할에 충실하되, 자율성을 갖고 능동적으로 상황에 대처하게 한 것이 군사의 효율을 높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내가 처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해서 부족한 건 메우고 더한 것은 덜어내어 살림을 안정되게 꾸려가는 일이다.

 필자가 잠시 광주시교육청에 몸담고 있을 때, 선거법 위반으로 교육감직을 잃었던 곽노현 전 서울시교육감을 초청해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만일 다시 교육감이 된다면 대부분의 정책사업을 없애는 대신 학교에 더 많이 예산을 내려서 자율성을 높이겠다던 당시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교육청을 떠난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어쩌다 공무원이 되어 의욕적으로 이런저런 사업을 벌이고 교육감의 공약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많은 일들이 교사의 업무량만 늘이고 학교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교사 대상의 연수를 통해 학교를 바꾸어 보려 하면, ‘우리한테 이러지 말고 관리자들(교장·교감)이나 교육해라. 우리는 권한이 없다’는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 소위 진보교육감들이 하나같이 자랑하는 혁신학교 또한 학교의 자생력을 떨어뜨리지는 않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시교육청은 혁신학교와 예비혁신학교가 해마다 늘어나는 것을 커다란 치적으로 삼지만, 헌신하던 교사들이 혁신학교를 떠나고 나면 말짱 도루묵이 되고 만다. 학교가 원하는 경우에만 혁신학교로 지정한다고 하지만, 최근의 대광여고 사태를 보면 은연중 조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도 든다. ‘배움의 공동체’를 이룬다고 하는 혁신학교에서조차 기초학력 미달 학생들을 돌보지 못하는 현실에서, 과연 누구를 위한, 무엇의 혁신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혁신을 일부 교사들께 맡겨둬선 안돼
 
 혁신학교로 지정되면 교육과정 운영에 자율성을 갖고 교직원의 안정적인 근무와 행정인력 확보에 필요한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묻자. 학교가 자율적으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교사들이 교육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행정을 줄이는 것이 어찌 특별한 일부 학교들만의 일이겠는가. 혁신학교의 핵심이 학교의 민주적 운영이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교무회의, 학년회의, 교과회의, 다모임회의 등을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왜 ‘혁신학교’의 특징이어야 하나. 그것은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모든 학교에서 해야 할 일이고, 소위 ‘진보’ 교육감이 지난 7년 동안 마땅히 실현했어야 할 일이다. 이제 더 이상 학교의 혁신을 혁신학교 일부 교사들에게만 맡겨 두지 말자. 헌신하는 몇몇 교사들을 돌려쓰는 것으로 학교의 혁신을 이룰 수는 없다. 교사가 부족한 면은 학부모가 채워가면 좋지 않겠는가. 학부모는 김장행사에 동원되는 대상이 아니라 교육과정을 교사와 함께 설계하는 당당한 주체가 되어야 한다.

 학교의 민주적 운영을 위해서는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교육의 목적은 더 이상 남들에게 배우지 않아도 될 만큼 사람들이 자신의 힘을 깨닫게 하는 데 있다. 자신과 이웃에 대한 믿음 없이 참된 배움은 없다. ‘배움의 공동체’는 ㄷ자형으로 책상을 배열하는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교사들 간의 신뢰와 협업을 이루는 일이고, 학교의 혁신은 교사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의 수장부터 교사와 학부모를 믿어야 한다. 교육청의 정책과제를 과감히 줄여서라도 학교의 자율성을 높이는 데 행정과 예산의 지원을 쏟아 부어야 한다. 당장은 제대로 걷지 못하고 쓰러져 다치더라도 걸음마를 내딛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것은 혁신학교 연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제 힘으로 걸으려는 교사가 나서고, 학부모가 박수치며 응원할 때 가능한 일이다.
하정호 <청소년플랫폼 마당집 마당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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