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Ⅱ’ 강제이수, 최상위권 유리하게
“소수 학생만 유리, 교육과정 ‘선택권’ 침해”

▲ 광주의 한 고등학교 교실의 수업 장면. 기사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음.<광주드림 자료사진>
 시험문제 유출 및 학사·평가관리 상 총체적 파행이 드러난 광주 사립고 K고에서 특히 최상위권 학생(기숙사반)에게 다방면으로 차별적인 특혜를 주고 있었다는 사실은, 과도한 입시경쟁이 낳은 성적지상주의의 씁쓸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애초에 K고가 짜놓은 ‘교육과정’ 판 자체가 서울대 등 명문대 입시에 유리한 ‘상위권 맞춤형’이었다면, 이는 수많은 다른 학생들을 볼모로 삼고 학습 선택권을 무참히 짓밟아 버린 심각한 폐단이 아닐 수 없다.

 광주시교육청의 특별감사에서 K고는 명문대 진학 실적을 높이려고 대학입시중심으로 교육과정을 부당하게 운영해온 사실이 확인됐다. 이는 단위학교별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권의 범위를 벗어난 것으로 다른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침해한 것이다.

 시교육청은 이달 7일까지 K고에 대해 특별감사를 벌인 결과를 지난 14일 발표하는 자리에서 “K고가 대학입시에 유리하다는 이유로 학생들의 과목 선택권을 제한하여 생명과학Ⅰ, 물리학Ⅰ·Ⅱ를 필수로 지정해 운영했다”고 밝혔다.

 이어 교육청 감사팀은 “다른 일반계 고등학교에서는 소수 학생만이 선택하는 물리학Ⅱ를 자연계열 전체 학생이 이수하게 해 최상위권의 내신 성적에 유리하도록 하는 등 학생의 수준이나 진로보다 입시위주의 교육과정을 운영했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서울대와 KAIST, 의·치대 등에서 과탐Ⅱ응시자의 지원만을 허용하고 있다.
 
 ▲“교양·창체는 영·수 교과 수업 대체”
 
 과학탐구(과탐)Ⅱ 과목, 그중에서도 물리Ⅱ는 다른 과탐Ⅰ 과목들에 비해 상위등급 획득이 어렵더라도 상위권 학생들에게는 입시경쟁을 위해 필수 과목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수능을 보는 정시뿐 아니라, ‘수시 학생부종합전형’에서도 고교에서 이수한 과목들이 반영되기 때문에 과학과목을 Ⅱ범위까지 공부할수록 유리하다는 것.

최근 교육청 감사 결과 시험문제 유출 등이 사실로 드러난 광주의 K고가 감사 내용에 반박하는 현수막을 학교 곳곳에 내걸었다.

 그렇다고 해서 최상위권 대학을 목표로 하지 않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심화 과목인 과탐Ⅱ을 강제 이수해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학습의 부담이 가중돼 다른 과목에 투입할 집중력을 빼앗기게 될 공산이 크고 해당 과목 내신점수에서도 상위권에 밀려나기 일쑤다.

 K고 졸업생인 A씨는 “물리Ⅱ를 수강할 때 교과내용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벅차서 수업시간 버티는 게 일이었다”면서 “나중엔 선생님도 답답해 하셔 모둠수업으로 대체했지만, 결국 대입에 필요한 과목도 아닌데 억지로 시간낭비를 한 것 같다”며 억울함을 표하기도 했다.

 또한 K는 교양과목인 ‘논술’과 ‘창의적 체험활동(진로활동)’ 시간에 영어·수학 수업을 했고, 교양교과인 ‘환경’과 ‘환경과 녹색성장’은 과학 선택과목 수업을 진행해 교육과정 편성과 불일치한 학사운영을 했다는 사실이 감사결과 드러났다.

 대입에 유리한 국·영·수 등 주요과목만 집중해 가르치고, 시간표 편성만 했을 뿐 다른 교과목들은 사실상 ‘삭제’해 버린 것이다.

 이는 ‘광주광역시 학생인권 보장 및 증진에 관한 조례’ 위반에 해당한다. 제 10조 학습할 권리에서 ‘학생은 법령과 학칙에 근거한 정당한 사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학습할 권리를 침해받지 아니한다’는 게 기본 원칙이다.
 
 ▲“학사관리 허술…타학교도 들여다봐야”
 
 특히 ‘학교는 학생의 의견을 수렴하여 정규교과 이외의 다양한 교육활동을 운영함으로써 학생의 실질적인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조항과 ‘학생은 정규적인 교육과정 이외의 자발적이고 명시적인 동의 없이 이뤄지는 강제적인 교육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조항에서 학생들의 학습 선택권이 강조되고 있다.

 이에 근거한 ‘광주광역시 학생중심 교육과정 편성 및 운영 매뉴얼(고등학교)’에서도 ‘기초교과(국·영·수) 이수 단위 총합은 교과 총 이수 단위의 50%를 초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 ‘학교는 진로중심 학생 맞춤형 교육과정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선택과목을 개설 또는 신설하여 편성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등의 지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일선 학교에서 교육과정 편성과 불일치하게 운영하더라도 이를 감시·제재할 장치가 부재한 게 사실이다. 보통 학교장 권한으로 교원, 학부모 등이 참여하는 학교 교육과정위원회에서 교육과정을 편성해 이를 교육청에 보고하는데, 이후 학교에서 교육과정대로 운영하는지 여부를 상시적으로 점검할 별도의 시스템이 없다.

 K고의 경우 재학생의 제보로 촉발된 시험문제 유출 사태를 계기로 10여 일 이상 이뤄진 특별감사를 통해 각종 학사·평가관리 상의 파행이 드러난 것이어서 다른 학교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교육과정을 부당하게 운영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관련해 광주시교육청 관계자는 “학사운영 등의 파행에 대해 신고할 수 있는 창구는 열려있지만, 신고가 접수되지 않고서는 300개가 넘는 고교의 실제 교육과정 운영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며 “학교가 필요에 따라 교육과정을 조정할 수 있기 때문에 K고 말고도 명문고로 알려진 다른 학교에서 이 같은 일이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다만, 시교육청은 정규 교육과정 이외의 교육활동(방과후활동 등)에 대해선 연 1회 실태조사를 하고 있다.

광주시교육청의 특별감사에서 K고는 명문대 진학 실적을 높이려고 대학입시중심으로 교육과정을 부당하게 운영해 온 사실이 확인됐다.
 
 ▲“학교 자율 교육과정 편성 제재 불가”
 
 학벌없는사회를 위한 시민모임이 지난 7월 광주시교육청으로부터 ‘2019년 광주 초·중·고교의 방과후학교 현황’을 받아 분석한 결과 광주 67개 고교 5240개 강좌 중 93.4%(4892개)가 교과 관련 강좌인 것으로 드러나 방과후활동의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학벌없는사회에 따르면, 이 중 K고와 G고 등 일부 학교에서는 국·영·수 등 여려 교과 강좌를 묶어 패키지 프로그램을 편성·운영하고 있어 사실상 성적 우수자반을 만들어 편법운영하고 있었다.

 학벌없는사회는 “학생들이 비희망 교과 강좌까지 수강해야 하는 등 학습 선택권을 침해받고, 특정학교에서는 패키지 프로그램을 은어로 사용해 성적 우수자반을 운영하는 등 관련 지침을 위반하고 있다는 제보가 있었다”면서 “방과후학교 운영이 지난친 교과 위주로 굴러가는 것보다는 특기적성 등 다양한 강좌를 마련해 학습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개선을 촉구한 바 있다.
김우리 기자 ur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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