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 바클렘의 ‘찔레꽃울타리’

 12월이 되고 첫눈이 내리면 마지막 잎새처럼 매달려 있던 가을은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세상 모두는 순식간에 겨울의 위세 아래 놓이게 된다. 겨울 외에 어느 계절에 ‘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을 수 있단 말인가. 숨죽이며 시간을 보내고 하염없이 봄의 따스함을 기다리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이는 계절이 돌아왔다.

 “오솔길과 덤불들이, 두껍고 하얀 눈 이불 속으로 숨어버린 들판은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찔레꽃울타리-겨울이야기’(질 바클렘 글, 그림 / 마루벌)

 하지만 나에게는 왠지 겨울은 ‘평화’를 떠올리게 한다.

 생명력이 사라져 버린 것 같은 산과 들, 바람이 차갑고 꽁꽁 얼어버려 웅크리고만 싶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따뜻한 방에 둘러앉아 구운 고구마랑 귤을 까먹으며 시덥잖은 농담으로 깔깔거리는 시간들도 있기 때문이다. 냉혹하게 차가운 바람과 얼음 아래로 여전히 멈추지 않는 물줄기가 있기 때문이고, 까칠한 나무껍질 안에 연둣빛 싹을 품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겨울은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린 것 같으면서도 가득 차 있는 혹은 응축되어 있는 계절, 씨앗으로 남겨져 겨울을 나는 일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사실 진정한 평화란 아무런 문제도 갈등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러한 상황에서도 서로가 존중되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협력하고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어떤 것을 포기하지 않는 것 아닐까. 불완전한 인간이란 존재가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삶의 매 순간을 평화로 채워가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결국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확인하고 기억하는 일이리라.

 12월이 되고 크리스마스 시즌이 돌아오면 책방도 겨울채비를 한다. 반짝이 장식을 하고 긴 겨울동안 읽기 좋은 책들을 골라 진열한다. 자수며 뜨개질 같이 알찬 시간을 만들어 줄 예쁜 사진 가득한 실용서부터 연말연시에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책도 있고 가까운 이들에게 선물하기 좋은 책들도 있다. 단지 상업적인 분위기에 휩쓸려 화려하게 장식하기 보단 겨울을 보내기에 책 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으로 그렇게 한다.

 익히 알고 있었는데도 이런 특별한 시즌이면 또 다시 마음을 울리는 책이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질 바클렘의 ‘찔레꽃울타리’ 시리즈이다. 영국의 작가 질 바클렘은 자연주의 그림동화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1980년에 출간된 ‘찔레꽃울타리’ 시리즈가 바로 대표적인 작품이다. 찔레꽃울타리 마을에 사는 들쥐들이 주인공인 이 그림동화는 작가가 꿈꾸는 이상적인 생활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와 모두에게 따스함을 느끼게 한다. 아직 소박함이 남아있고 무엇이나 손으로 정성들여 만들고 서로 돕고 살며 자연을 해치지 않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 그림 속의 들쥐들은 옛 시절의 옷을 입고 자신들의 손으로 생활을 나간다. 너무 당연한, 그렇지만 실제로는 경험하기 힘들어진 그런 생활 말이다. 어릴 적 자연 속에서 자라고 관찰과 상상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따스하게 발전시킨 작가는 아마도 사람들이 사는 세계가 이런 식으로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흰 눈이 온 세상 덮은 날, 들판은 고요히 잠이 들고.

 가지마다 하얗게 눈꽃 핀 날, 밤하늘 별들도 덩달아 새하얗고.

 흐르던 시냇물 꽁꽁 언 날, 눈 축제는 우리 가슴 녹여 준다오.”
 
 마을이 온통 눈으로 덮혀 옴짝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찔레꽃울타리 마을의 들쥐들은 서로 왕래할 지하통행로를 만들고 오히려 몇년만에 눈 축제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시를 읊는다.

 겨울채비 하듯 책방을 이리 저리 정리하다 말고 앉아 다시 읽는 ‘겨울이야기’에서 평화를 떠올린 것은 너무 거창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겨울 같은 현실 속 웅크리고 있을지라도 마음속 눈 축제를 벌이는 일은 멈추지 말아야겠다 싶다. 이제는 욕심으로 인해 잊혀진 사랑·우정·협동·자연의 소중함. ‘그런 것이 소중하지만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어’ 라는 말로 애써 자위하고 있는 겨울과 같은 현대사회에서 진정으로 지켜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답해야 하지 않을까.
문의 062-954-9420

이진숙 <동네책방 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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