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적 삶, 사실적으로 그려

▲ 김유정. 그림 강현화.   
 김유정을 좋아한다는 친구가 있었다. 반갑고 놀라웠다.

 어떤 작가를 좋아한다는 표현을 누군가 한 것 자체가 반가웠고, 김유정을 진짜 좋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평소에 있었기에 놀라웠다. 그에게 김유정의 소설 30편을 다 읽어보았느냐고 묻고 싶었다. 다 읽어봤다면 좋아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그런 걸 묻는 건 실례 아닌가.
 
▲봄·봄/동백꽃
 
 김유정(1908~1937)은 193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 중 한 사람이다. 특히 ‘봄·봄’과 ‘동백꽃’은 학생들에게 김유정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잠깐 살펴보자.
 
 “장인님! 인젠 저…….”
 내가 이렇게 뒤통수를 긁고 나이가 찼으니 성례를 시켜 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면 그 대답이 늘,
 “이 자식아! 성례구 뭐구 미처 자라야지!”
 하고 만다.
 이 자라야 한다는 것은 내가 아니라 장차 내 아내가 될 점순이의 키 말이다.
 내가 여기에 와서 돈 한푼 안 받고 일하기를 삼 년 하고 꼬박이 일곱 달 동안을 했다. 그런데도 미처 못 자랐다니까 이 키는 언제야 자라는 겐지 짜장 영문 모른다. 일을 좀더 잘해야 한다든지, 혹은 밥을 (많이 먹는다고 노상 걱정이니까) 좀 덜 먹어야 한다든지 하면 나도 얼마든지 할 말이 많다. 허지만 점순이가 아직 어리니까 더 자라야 하다는 여기에는 어째 볼 수 없이 고만 벙벙하고 만다. (‘봄·봄’ 시작 부분)
 
 소설 ‘봄·봄’의 이야기는 이어서 이렇게 전개된다.
 
 동네 사람들은 ‘나’를 미련한 바보 취급해 놀리는 한편, 마름이기도 한 장인의 횡포를 비난하기도 한다. ‘나’는 결단성이 부족하고 바보스러운 면도 있지만,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장인과 대판 싸운다. 점순이조차 ‘나’와의 결혼을 은근히 바라는 듯한 눈치에 더욱 힘을 얻는다. 그러나 장인의 사타구니를 붙잡고 곧 항복을 받아 내려는 순간 점순이가 달려들어 장인의 편을 든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게 서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은 1930년대 농촌의 지주와 머슴 관계 등 경제 현실, 김유정 특유의 향토색 짙은 언어를 살피기에 적합한 작품으로 꼽힌다. 그가 정말 자신의 재능을 의식하고 특징을 나타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사춘기 순박한 시골 남녀가 벌이는 사랑 이야기인 ‘동백꽃’도 해학과 아이러니 등 김유정 소설의 특질이 잘 나타나있는 작품이다.
 
 그리고 뭣에 떠다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너 말 마라.”
 “그래!”
 조금 있드니 요 아래서
 “점순아! 점순아! 이년이 바느질을 하다말구 어딜 갔어?” 하고 어딜 갔다온 듯 싶은 그 어머니가 역정이 대단히 났다.
 점순이가 겁을 잔뜩 집어먹고 꽃밑을 살금살금 기어서 산알로 나려간 다음 나는 바위를 끼고 엉금엉금 기어서 산우로 치빼지 않을 수 없었다. (‘동백꽃’ 끝부분)
 
 이 작품에는 ‘사랑’이라는 언어적 표현이 한 마디도 없다. 하지만 도리어 그 때문일까, 이 작품은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느끼기에 충분하다. 이 대목을 어린 시절에 읽으면서,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한 그 사랑의 장면이 좀더 자세하게 묘사되기를 기대하며 아쉬워했었다.

 ‘봄·봄’과 ‘동백꽃’ 두 작품이 김유정의 대표작품 지위를 갖게 된 데는, 이 작품들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오래도록 꾸준히 실리고 있는 점도 한몫을 한다. 이는 김유정 문학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바람직한 현상이기도 하겠지만, 한편 김유정 문학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한다는 점에서는 부정적인 작용도 한다.

 ‘봄·봄’과 ‘동백꽃’은 각각 1936년 5월과 1935년 12월에 ‘조광’(조선일보사)에 실렸는데 작품 제목 앞에 ‘농촌소설’이라는 장르표지가 붙어있다. 이에 김유정은 농촌 출신 작가라든가 강원도 토박이라든가 사투리를 풍요로이 개발했다든가 등등 농촌작가의 전형인 것처럼 묘사돼왔다.
 
▲조선의 집시: 들병이
 
 하지만 그의 소설 30편 가운데 절반은 도시를 배경으로 한 소설이고, 그 절반의 창작 시기 또한 작가로서 성숙한 시기인 작품 활동 후기에 속한다. 2남 6녀 중 일곱째로 태어난 그는 조실부모하고 11살에 서울의 재등소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휘문고보를 다녔으며, 연희전문, 보성전문 등에도 한때 적을 둔 바 있다. 그가 춘천으로 내려와 머문 것은 22세 때고 3년간 지낸 것으로 되어 있다. 1930년에서 1933년까지니까 20대 초반이다. 이런 전기적 사실을 살펴보더라도 김유정을 농촌작가의 전형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조금 어색하다.

 한편 그의 작품에 배어 있는 유머감각을 부각시키고 이를 ‘흥부전’으로 대표되는 우리 고전의 해학미에 연결시키는 연구도 일찍이 있어왔다. 이에 대해서는 “김유정 투의 유머감각이 흡사 우리의 1930년대 농민 또는 기층민중의 실체처럼 인식될 수 있다”(김윤식, 1996)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다. 실로 김유정이 작품을 쓴 1930년대 중엽은 일제 식민지 파시즘 체제와 수탈 정책이 더욱 악화되어 우리 민족이 극도의 부자유 속에 놓이고 민중이 궁핍 속에서 신음하던 때인 동시에, 파시즘이 세계사적 규모로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김유정을 1930년대 한국의 대표적인 소설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과연 어디에 둘 수 있을까. 그것을 ‘들병이 철학’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일부 비평가들 사이에 있어왔다.

 특히, 비평가 김윤식은 김유정을 ‘큰예술가’(이상의 표현)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그의 ‘들병이 사상’에 있을 것이라고 했다. 비평가의 말을 인용해본다.
 
 “김유정 문학의 출발점에 놓인 것이 바로 들병이 사상이 아니었을까. 들병이란 무엇인가. 남편 있는 여인이 시골 주막으로 돌아다니며 술과 몸을 파는 것을 들병이[들뼝이]라 불렀잖습니까. 말하자면 조선판 집시인 셈이지요. 이들이 저지르는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을 골고루 알고 이에 대한 미묘한 윤리적·미학적 감각에 형언할 수 없는 표현의욕을 실었던 것, 여기에 김유정 문학의 출발점이 있지 않았을까. 이 들병이에게서 김유정이 이끌어낸 철학이란 무엇일까. ‘아내를 내놓고 그리고 먹는 것’(전신재, 1987. 392쪽 참조)으로 이를 정의할 수 있습니다. 말을 바꾸면 들병이 쪽의 의식이아니라 그 ‘남편의 의식’의 총칭에 붙여진 철학인 것입니다.”(김윤식, ‘들병이 사상과 알몸의 시학’, 1996)
 
 비평가는 이에 더 나아간다. 다만, 이 ‘더 나아간’ 해석에 대해서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자기 아내를 매음시켜 그것으로 생계를 삼을 뿐만 아니라 즐기기조차 하는 사상이나 철학이란 새삼 무엇인가. 절망적 상황에 직면한 자가 그 절망을 속이고, 그것이 아무것도 아닌 자연스런 생리적 현상으로 파악하기, 그러니까 자기기만의 사상으로 이 사정이 요약될 터입니다. 이는 단연 우리 문학에선 낯선 대목 아니겠는가. ‘총각과 맹꽁이’(1933), ‘솟’(1934), ‘안해’(1935)는 물론, ‘봄봄’(1935)이나 ‘동백꽃’(1936)조차 이 범주의 변형이라 할 수 없겠는가.”(김윤식, 같은글)
 
 어쨌든, 실제로 들병이 모티브는 그의 소설 전반에 주되게 사용되어 있다. 그 가운데 ‘안해’는 들병이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깐 농사를 지어 뭘 하느냐, 우리 들병이로 나가자, 고. 마는 내 주변으로 생각도 못했던 일이지만 참 훌륭한 생각이다. 미찌는 농사보다는 이밥에. 고기에, 옷마음대로 입고 좀호강이냐. 마는 년의 얼굴을 이윽히 들여보다간 고만 풀이 죽는구나. 들병이에게 술 먹으로 오는건 게집의 얼굴 보자하는걸 어떤 밸없는 놈이 저낯짝엔 몸살 날것같지 않다. 알고보니 참 분하다… 년이 이렇게 아주 번죽좋게 장담을 하는것이 아니냐. 들병이로 나가서 식성대로 밥좀 한바탕 먹어보자는 속이겠지. 몇 번 다 저물어도 제가 꼭 될수있다니까 압따 그러면 한번 해보자구나 미천이 뭐드는 것도 아니고 소리나 몇마디 반반히 가르켜서 데리고 나스면 고만이니까. (‘안해’)
 
 또 다른 작품 가운데 ‘솟’은 들병이 소설 가운데 가장 강도가 강한 작품이다. 김유정은 자신의 실제 경험을 그대로 ‘솟’에 형상화했다. 이 작품에서 들병이의 남편은 자신의 아내와 동침한 남자를 직접 목격한 현장에서조차 전혀 감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갈 길을 재촉할 뿐이다.
 
 심지어 ‘가을’은 아내 매매를 다루고 있다. 이 소설의 화자인 ‘나’는 ‘복만’과 ‘황거풍’ 사이의 거래에 계약서를 써준 인물이다. ‘나’는 빚을 갚기 위해 아내를 매매하는 복만을 말릴 수가 없다. 오히려 팔 아내가 있는 복만이 부럽기까지 하다. 집안에 팔 여자라곤 어머니 밖에 없지만 병든 몸이고 나이가 많아서 팔 수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이런 인신매매가 당시에 성행했다는 점이다.
 
 처자를 매매하던 풍습은 빈민들 간에서 1930년까지도 성행했다. 초기의 방식은 전당포에서 저당을 하는데 연령·美醜·性을 제공하는 여부에 따라서 貸金額에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저당된 인신은 홀아비로 사는, 주로 일인들에게 기한부로 轉貸되는데, 돈을 갚을 동안 취사, 세탁은 물론 계약에 따라서는 잠자리까지도 제공해야 한다. 貸金이 변제되면 돌려지는 것이 원칙이지만 더러는 몸값을 더 물고 사 버리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임종국, 한국문학의 사회사, 정음사, 1982. 김주영, 2014.에서 재인용).
김유정의 단편 21편이 수록된 ‘동백꽃’(1938). 그의 사후에 출판됐다. 작품집 표지의 붉은 동백꽃 그림이 이채롭다. 그런데 김유정 소설 속 ‘동백꽃’은 실제로는 (노란)생강나무 꽃이다. |||||
 
▲리얼리즘의 승리
 
 한편, 김유정은 자신의 글 <조선의 집시: 들뼝이 철학>(매일신보, 1935. 6회에 걸쳐 연재)에서 들병이의 문제를 조명하고 있다. 여기서 김유정은 1930년대 들병이의 생태를 파헤치고 있다. 이러한 들병이의 생태가 그의 여러 소설로 형상화된 것이다.
 
 안해를 求景거리로 開放할意思가, 잇는가 或은 그만한勇氣가잇는가, 나는 이러케가끔뭇고십흔 衝動을늣긴다. 물론 社交界에 容納한다는 意味는 아니다. 안해의 出世와 幸福을 바라지안는者이 누구랴―
 그러나 내가하는말은 自己의안해를 大衆의구경거리로 던질수잇는가, 그것이다. 그야 일부러 物資를 드려가며 離婚을 訴訟하는 夫婦도 업지는 안타. 마는 極盡히 愛之重之하는 自己의안해를 大衆에게 奉仕하겠는가, 말이다.
 밥! 밥! 이러케 부르짓고 보면 대뜸 神聖치못한 餓鬼를 聯想케된다. 밥을 먹는다는 것이 따는 그리 神聖치는 못한가부다. 마치 이社會에서 求命圖生하는 糊口가 그리 神聖치는 못한것과 가치―거기에는 沒自覺的 服從이 必要하다. 破廉恥的 處世가 필요하다. 그리고 賣春婦的愛嬌 阿諂도 필요할는지 모른다. 그러치 안코야 어디 제가 敢히 社會的地位를 壟斷하고 生活해 나갈 道理가 잇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그런 모든 假面 虛飾을 벗어난 覺醒的 行動이다. 안해를 내놋코 그리고 먹는 것이다. 愛嬌를 판다는것도 近者에 이르러서는 完全히 勞動化하였다. 勞動하야 生活하는 여기에는 아무도 異議가 업슬것이다.
 이것이 卽 들뼝이다. (‘조선의 집시’)
 
 들병이는 자기의 아내를 사람들의 노리개로 내어 놓고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행위다. 그것은 남편과 아내 사이에 요구되는 사회적 혹은 윤리적 통념을 뛰어넘는 무엇이다. 파렴치한 처세와 매춘부적 자세도 필요하다. 그것은 모든 가면적 허식에서 벗어나 먹고살기 위해 해야만 하는 노동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김유정은 들병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들병이는 궁핍한 상황으로 내몰린 부부들이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이기 때문이다(김주영, 2014).
 
 들병이의 생태에 대한 김유정의 분석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그들도 처음에는 다 납뿌지안케 성한 五臟六腑가 잇섯다. 그리고 남만 못하지언케 낌끌한 希望으로 땅을 파든 農軍이엇다.
 農事라는것이 얼른 생각하면 閑暇로운 神仙노릇도 갓다. 마는 實相은 그런 苦役이 다시 업슬것이다.땡볏헤 논을 맨다. 김을 맨다. 或은 비 한방울에 渴急이나서 눈감고 꿈에까지 天氣를 엿본다―그러나 어테케 해서라도 農作物만 잘 되고 秋收에 所得만 如意하다면이야問題잇스랴.
 가을은 農村의 唯一한 名節이다. 그와 同時에 여러 威脅과 屈辱을 격고나는 한 逆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지주와 빗쟁이에게 收穫物로 주고 다시 한겨울을 念慮하기 爲하야 한해동안 땀을흘렷는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한번 憤發한것이 즉 들뼝이生活이다. 들뼝이가 되면 밥은 食性대로 먹을수잇다는것과 또는 그 準備에 돈한푼 안든다는이것에 그들은 魅惑된다. 안해의 얼골이秀色이면더욱조타. (김유정, 조선의 집시)
 
 말하자면 들병이는 당시 사회가 빚어낸 현상이었고, 김유정은 그들의 현실적인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이다. 그런 점에서 1930년대 현실을 그려냄에 있어서 이광수나 심훈(심지어 카프계열 작가인 조명희나 이기영)과 김유정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전자가 농민을 계몽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지식인을 주로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반면, 김유정은 ‘소낙비’를 포함한 자신의 작품들에서 농민의 유랑과 매춘, 그리고 도박의 문제 등을 다루면서 당시 뿌리 뽑힌 삶을 살아야 했던 유랑민이 꽉 막힌 삶 속에서 탈출구를 찾기 위한 처절한 노력, 즉 강인한 생명력을 김유정은 사실적인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다(김주영, 2014).
 
 비평가 김영기(‘농민문학론-김유정의 경우’, 1983)는 이를 ‘리얼리즘의 승리’라고 표현했다. 김유정을 좋아하는 내 친구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김유정의 리얼리즘에 깃든 휴머니즘을 공유했던 것이라고 믿는다.
 
 [참고문헌]
 원본김유정전집(김신재 편), 한림대학출판부, 1987
 김유정: 한국대표명작총서8(이선영 편저), 벽호, 1993
 김윤식 선집5: 시인·작가론(김윤식), 솔, 1996
 김유정과 동시대 문학 연구(유인순 외), 소명출판, 2013
 김유정 문학의 사실성과 전통성 연구(김주영), 우석대학교 대학원(박사), 2014
 
글=문수현, 그림=강현화
 
 [글쓴이 문수현은]
 전북대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 현재 전북교육신문 기자.

 [그린이 강현화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지금은 시골살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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