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권 `한류’ 핵은 `5·18 광주’”
“인간성 훼손 목격 뒤 팍 터져버린 맑은 정신”
“한국의 민주주의는 학생운동과 5·18로 완성”

▲ 동남아시아에서 5·18을 전파하고 다닐 무렵의 서유진 선생. 정글을 누빌 때 오토바이는 그가 즐겨 탄 교통수단이었다.<서유진 선생 제공>
 “80년 5월 광주시민들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을 목격하게 됩니다.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의 존엄성 훼손을 보며 팍 터져버린 맑은 정신, 저항, 항쟁이 5·18정신이에요. 특정 세력이 조직한 게 아니란 겁니다.”

 전북 남원 태생인 서유진 선생이 ‘5·18’에 매료된 배경이다.

 “민중 봉기는 세계사적으로 여러 건 있었어요. 그럼에도 유독 광주에서 일어난 봉기는 유니크하죠. 전 시민(당시 80만 명)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잖아요. 오죽했으면 계엄군도 놀라서 (일단)물러나고 말았잖소. 광주 외곽이 계엄군에 포위대 고립된 10일을 봐요. 그 시간은 소위 법과 질서가 무너진 상태에요. 이러면 반드시 가게 침탈, 은행 탈취, 교도소 습격 등 공격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광주에선 이런 게 하나도 없었어요. 안에서는 주먹밥 나눠먹는 공동체가 형성되고, 젊은이들은 소총 몇자루로 무장하고 탱크와 헬리곱터로 무장한 정규군과 맞장뜬겁니다. 이런 사건은 전세계에 없어요.”

 이런 자부심으로 그는 5·18정신을 들고 아시아로 나갈 수 있었다.

 

▶사회를 바꾸는 활동가의 텍스트

 

 “사회를 바꾸는 활동가들의 텍스트로,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어요. 한국 민주화운동의 핵심인 학생운동이 5·18과 맥이 닿아있습니다. 1930년 광주학생독립운동, 민간독재를 무너뜨린 4·19, 부마항쟁, 5·18 거쳐 87년 6월항쟁까지…. 한국이 이룬 민주주의는 한 선상에 있는 학생운동사와 5·18이 주된 텍스트라구요.”

 설명이 이어진다. “아시아인권위원회가 5·18의 모든 것을 잘 알았어요. 이 단체는 아시아에서 인권이 무시되는 많은 나라를 상대로 한 인권 운동가를 훈련시키는데. 그들이 텍스트로 선호한 게 5·18입니다. 그래서 동티모르·태국·캄보디아 등에서 운동가들 트레이닝할 때 저를 부르는 겁니다. 그러면 끊임없이 달려가 광주 정신을 전파하는거죠.”

 그래서 그는 단언한다. “한류의 핵은 ‘80년 5월 광주’”라고. “내 말이 아녜요. 태국 영자신문 기자가 한류 토론회에 나와서 주장한 겁니다.”

 서유진 선생은 80년 5월, 광주에 있지 않았다. 광주 출신도 아니다. 남원에서 태어난 그는 북중-전주고를 졸업하고 한국외대로 이어지는 학력을 갖고 있다.

 “80년에 미국에 있었어요. 당시 신군부가 국내 언론을 철저하게 통제해 광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대한민국에서 알 수 없었잖아요. 그런데 군부가 실패한 게 뭐냐면, 한국 내에서 취재중인 외신 기자들을 통제 못한 거예요. 외신기자들이 취재한 뉴스가 미국의 지상파인 ABC 나이트닝 뉴스 헤드라인에 보도되는 겁니다.”

 낯선 이국에서 마주한 고국의 참상은 큰 충격이었다.

 “그 처참한 사진들. 시체들이 쌓여 있고. 트럭에 ‘전두환 찢어죽여라’ 써 있고. 이런 생생한 사진들을 밖에서 보고 있었다니까요.”

 그리고 2년 뒤인 1982년 12월 김대중이 미국으로 ‘망명’했다.

 “망명이라고 하면 안돼요. 망명이라는 건 자기가 한 정치적 행위로 인해, 그 시스템에서 위협받고 죽을 상황에서 몸을 피하는 것이죠. 그런데 DJ는 뭐냐면. 80년 5월 광주 학살 후에 전두환이 사형 언도하고 죽일려고 했어요. 그런데 미국이 ‘죽이면 도와줄 명분 없어. 죽이면 안돼’ 하고 압력을 넣은 겁니다. 거기에 못이겨서 미국으로 보낸 겁니다. 미국은 받은 거고. 이것은 망명이 아녜요.”

 

▶82년 미국에서 DJ를 맞이하다

 

 어찌 됐든 DJ가 도착했을 때 미국엔 문동환·한완상 등 민주화 운동 인사들이 있었다.

 80년 5월 광주에 무력을 행사할 무렵 신군부가 민주화 인사 2500여 명을 수배자 명단에 올렸는데, 한완상·문동환 등이 이에 올라 귀국하지 못하고 남아 있던 상태였다.

 이들들은 미국에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을 결성·활동했다. 당시 서유진 선생은 미국에서 이들과 교류했다.

 70년 대 무역회사에서 근무했던 서 선생은 업무차 서울 소재 미국 대사관에 자주 들렀는데 그때 직원 한 명을 알게됐다고 한다.

 그 직원 소개로 미국 메릴랜드 주립대학에서 공부하는 기회를 갖게 됐다. 70년대 중반이었다. 이후 생계와 공부를 병행하는 게 버거워 커뮤니티 칼리지로 전학, 비지니스·회계 관련 공부를 했다고 했다.

 그렇게 정착한 미국에서 DJ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82년 12월인가 그래요. 문동환 목사·하비 목사 등과 함께 공항에 가서 DJ를 맞아 준비한 차로 버지니아에 있는 수도원으로 갑니다.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시킨 것이죠. 미국 언론에 잘못 노출되면 곤란할 수 있겠다 싶었거든요.”

 

 ▶국무성 앞서 ‘광주 학살 처벌’ 시위

 

 하지만 곧 생각은 다른 데로 미쳤다.

 “어찌보년 DJ는 우리에게 좋은 계기였어요. DJ도 다시 추스르고, 언론 앞에 나서면서 한국에서 군부가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이르고 다닌 겁니다. 한국 군부로선 미칠 노릇이었을 거예요.”

 당시 서유진 선생을 비롯한 재미 민주화 인사들은 거의 매일 미 국무성 앞에서 시위를 했다. ‘광주 학살 책임자 처벌’을 외친 것이다. “워싱턴포스트 같은 신문에서 ‘(광주에서)얼마나 죽었냐?’고 물어요. 당시는 정확한 규모를 알 수 없었으니까. 죽은 사람만 2500명이라고 말합니다. 대사관이나 안기부선 해명하느라 미쳐버리고. 그런데 (미국)언론은 걔들 말 안믿거든.”

 당시를 회고하는 서유진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게 올바른 수는 아니지만, 악의 세력과 싸울 때는 같이 악으로 붙을 수밖에 없었다”고.

 미국에서 ‘광주 학살 진상 규명’을 투쟁했던 인사들은 그렇게 갖은 수를 동원해 미국 측을 압박했다.

 “국무성·인권국 등내 진보적인 그룹에겐 항상 이렇게 말했어요. ‘미국이 한국 군부를 도와주는 인상을 주면 한국 사람들이 미국을 증오할 것이다. 니들이 잘못된 세력을 도와주면 반미가 싹틀 것이다’라구요.”

 한국 군부 독재 세력과 미국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놓자는 전략이었다.

정리=채정희 기자 good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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