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재 `서재필’은 어머니가 뽕나무에 용이 타고 올라가는 꿈을 꾸고 1864년 외갓집 보성에서 태어나서 1951년 미국에서 사망했다. 아들이 태어나던 그날 아버지 서광언이 과거에 급제해 겹경사가 일어나서 `쌍경’ 이라고 불렀다. 서재필은 서종태, 서명균, 서지수 등 3명의 정승과 서유신, 서영보, 서기순 등 3명의 대제학의 후손으로 최고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달성 서씨이고 어머니는 성주 이씨이며 친척 이광하에게 입양되어 자랐다.

 서재필은 13세에 고종이 주관하는 전강에 장원했다. 15세에 4살 연상의 경주이씨와 결혼하여 사별하고 17세에 광산김씨와 재혼했다. 18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했고 19세에 일본 도야마 육군학교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았다. 20세에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에 참여하여 병조참판이 되어 수구파를 처단했다.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실패하자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갑신정변으로 서재필의 생부 서광효는 투옥되어 자결했고 생모 성주이씨는 노비가 되어 자결했다. 양부 서광하와 양모 광산김씨 그리고 친형 서재춘 부부와 이복형 서재형 부부는 자결했다. 남동생은 서재창은 참수됐고 남동생 서재우는 나이가 어려서 살아남았다. 누나와 누이는 겨우 살아남아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 아내 광산김씨는 투옥돼 관기가 되자 음독자살했고 2살 먹은 아들은 굶어죽었다. 서재필의 생가, 양가, 외가, 처가 등 4대가 멸문지화를 당했다.

 

 서재필 갑오개혁 후 귀국 독립협회 조직

 

 서재필은 21세에 일본의 냉대를 받자 다시 미국으로 망명해 감리교 신자로 개종했다. 25세에 코크란대학 야간학부에서 세균학을 전공해 한국인 최초로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26세에 미국인으로 귀화해 한국인 최초로 시민권을 획득해 `필립 제이슨’이 되었다. 서재필은 30세에 뮤리엘 메리 암스트롱을 만나 가정교사로 있다가 재혼했고 갑오개혁으로 역적에서 벗어났다. 미국인 자격으로 귀국하여 10년 동안 매월 300원을 받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됐다. 그리고 일본과 정부의 도움을 받아 독립협회의 기관지로 `독닙신문’을 만들었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한글신문으로 1896년 4월7일부터 1899년 12월4일까지 발행됐다. 서재필은 이상재·이완용 등과 함께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고문이 되었다. 독립협회가 고종의 폐위를 주장하자 고종이 독립협회를 해산했다.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 자리에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독립문을 세웠다.

 서재필은 34세에 중추원 고문직에서 해고되자 계약이 남아있는 7년 10개월 급여를 모두 받아서 미국으로 돌아갔다. 81세에 넘어 미군정청 최고 정무관이 되어 다시 귀국했다. 84세에 대통령으로 출마하여 1표를 얻어 낙선했고 미군정이 종식되자 미국으로 돌아가서 87세에 사망했다. 1977년 건국훈장이 추서됐고 1994년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친일·친미 등 과거 행적 논란 이어져

 

 `이토 히로부미가 서울에 올 예정인데 대한제국의 독립 사업에 대공이 있는 사람이므로 정부와 인민은 각별히 후대하기를 바란다’고 서재필은 독립신문 1898년 8월20일자에 사설을 실었다. `서재필은 고종을 알현할 때 안경을 쓰고, 궐련을 꼬나물고, 뒷짐을 지고 나타나 다른 나라의 신하를 칭했다’고 황현은 매천야록에 기록했다. `서재필은 원로대신, 젊은관료 할 것 없이 마치 버릇없는 애들을 타이르듯 말하거나 다루었으나 미국의 보호를 받고 있는 서재필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고 윤치호는 영문일기에 남겼다. 서재필은 1948년 미국으로 떠나면서 `우리 한국 사람은 단결할 줄을 모르고 당파 싸움만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수가 많은데 한심한 일이오’라고 말했다. 지금도 서재필의 친일·친미 등 과거행적에 대해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흔히 `서재필 박사’ 라고 하지만 박사학위는 취득하지 않았고 의사면허를 취득했다. 또한 서재필은 일본으로부터 독립이 아니라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주장했다. 2003년 서재필의 얼을 기리고 호국정신과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내마을에 서재필 기념공원을 개관했다. 기념관에는 800여 점의 유물과 사당, 동상, 야외공연장이 함께 들어섰다. 또한 서재필이 태어났던 외갓집을 복원했고 독립문을 똑같은 크기로 복원했다. 보성에 가면 서재필 기념관과 더불어 태백산맥 문학관과 송광사, 낙안읍성, 주암호 등을 함께 볼 수 있다. 서재필보다 보성의 녹차와 벌교의 꼬막이 유명하다.

서일환<우리들병원 행정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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