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맺힌 삶, 이승 못떠나는 어머니
전통 춤과 연희로 꽉 채운 무대 ‘감탄’

▲ 연극 비나리. 극단 맥 제공
 2018년 11월9일은 연극을 좋아하는 내게 행운의 날이었다. 광주에 있는 극단 ‘푸른연극마을’의 전용극장인 ‘씨어터 연바람’에서 부산 극단 ‘맥’의 ‘비나리’를 볼 수 있어서다.

 ‘맥’의 ‘비나리’는 2013년 프랑스 아비뇽 연극축제에서 대성황 속 전석 매진을 이루어낸 작품이다. 세계 10대 신문 중 하나인 ‘피가로’는 아비뇽 페스티벌에 참가한 1300여 편의 작품 중 10편의 작품에만 리뷰를 실었다.

 ‘비나리’는 리뷰가 실린 10편 중 하나였고, ‘한국의 보석 같은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이후 프랑스의 각 방송국과 신문·잡지를 통해 ‘비나리’에 관한 스무 편의 리뷰가 나갔다. 2016년에는 아비뇽 페스티벌과 양대 산맥을 이루는 예술축제 에든버러 페스티벌 프린지에서 별 4개를 받았고, 8개의 리뷰가 나왔다.

연극 비나리. 극단 맥 제공

 부산 극단 ‘맥’은 1986년 12월에 창단했다. 지역의 특성을 살린 설화·민담·역사·민속·무속을 소재로 전통연희형식의 무대를 새롭게 창작해내는 작업을 30년 넘게 해오고 있다.

 ‘비나리’는 2008년 전국향토연극제에서 대상·연출상·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한 ‘개똥할매’를 개작한 작품인데, 외국인들에게 좀 더 쉽고 친근하게 다가가도록 많은 수정을 했다. 기본 형식의 토대는 동해안 별신굿의 오구굿에서 가져왔다. 거기에다 가면극과 동래야류, 풍물, 판소리, 민요를 더해서 작품을 만들었다.
 
▲‘천의 얼굴’ 연기한 배우들 감탄
 
 오구굿은 이승을 헤매는 원혼을 위로하여 한을 풀어주고 극락으로 천도하는 굿이다. 여기에 동래야류 네 과장 중 마지막 과장인 영감할미 과장이 접목되었다. 집을 나간 영감을 찾는 할미가 제대각시를 얻어서 살고 있는 영감을 찾지만 결국은 혼자서 아이들을 키우며 힘들게 삶을 살다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할미의 한을 풀고 원혼을 천도하는 것이 ‘비나리’의 기본 줄거리이자 형식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부제는 ‘어머니의 기억’이다. 어머니의 고통스럽고 외로운 삶을 알지 못하는 아들 둘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야 고인을 그리워하고 기리며 슬픔을 느낀다. 원래 동래야류는 대사가 많은 공연이지만 ‘비나리’는 전체적으로 대사를 많이 제한하고 소리(노래)와 춤과, 가면극으로 꼭 한국인이 아니라도 공감할 수 있는 정서를 이끌어낸다.

 극은 젊고 아름다운 무당이 흔드는 요령 소리로 시작된다. 어머니는 이승에 한이 많아 죽음의 길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고 슬퍼하는 자식들의 배웅을 받으며 점차 저승길로 들어선다. 그래도 어머니는 미련이 남는다. 뭐가 그렇게도 이승에 미련이 남아 어머니는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한다.

 그래서 영감할미 과장이 시작된다. 아직 여기를 떠나지 못하겠는 어머니의 기억이 시작되는 것이다. 부산 동래지역 들놀음(넓은 들판에서 놀다)에서 시작된 영감할미 과장은 우리의 전통 연희답게 해학과 풍자가 넘친다. 당연히 웃음이 질펀하다. 고통스러운 삶과 죽음으로 인한 이별의 과정을 보여주면서도 그저 무겁거나 슬픔에만 절어 있지 않고 가볍고 때로 무심하게 삶과 죽음을 다룬다. 소극장이지만 기본이 마당극이므로 관객들과 즐거운 소통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연극 비나리. 극단 맥 제공

 징과 장구를 치는 사람과 소리를 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주로 무대를 꾸미는 것은 남자 배우 둘과 여자 배우 둘인데, 그들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보는 내내 감탄을 멈출 수 없었다. 흔히들 배우를 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는데 이들이야말로 그 말에 딱 들어맞았다.

 굿을 진행할 때 그 진지하고 때로 심각한 표정과 해학과 풍자로 이루어지는 영감할미 과장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또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에의 변신이었다. 춤을 출 때의 몸짓과 손짓, 발짓에는 섬세한 디테일이 살아있었고 감정이 그대로 실려서 관객들 마음을 송두리째 훔쳤다. 우리나라 전통의 춤과 연희를 이렇게까지 공연할 수 있는 극단과 배우들이 있었다니 공연 시간 80분 내내 놀라움과 기쁨을 느꼈다. 고맙기까지 했다.
 
▲‘연극 있다 잇다’ 프로젝트 이어져
 
 부산까지 혹은 아비뇽이나 에든버러까지 가지 않아도 ‘맥’의 ‘비나리’를 볼 수 있었던 것은 1993년에 창단되어 20년이 훌쩍 넘게 공연을 이어오고 있는 광주 극단 ‘푸른연극마을’이 작년부터 시작한 연극 프로젝트 ‘연극 있다 잇다’ 덕분이었다. 소극장 활성화의 한 방안으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지역 간의 교류와 다양성을 지닌 좋은 공연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2018년의 ‘연극 있다 잇다’에는 아직 네 편의 공연이 더 남아 있고 12월 12일까지 계속된다. 서울 지역 극단 2개와 대구와 함안의 극단 공연이 관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죽음과 이별 그리고 삶은 인간들에게 영원한 주제다. 그 중에서도 남편에게 버림받고 홀로 자식들을 키우다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는 설령 대사가 전혀 없다고 해도 그림만으로도 충분한 소재이며 주제이리라.

연극 비나리. 극단 맥 제공

 무당이 온 몸으로 흰 천을 두 갈래로 찢으며 죽은 자가 이제 다시는 이승으로 돌아올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관객 몇 명은 결국 훌쩍이고 말았다. 프랑스 관객들이 그랬다는 것처럼 말이다. 지금 전 세계를 돌며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대세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의 공연 못지않은 훌륭한 퍼포먼스를 부산의 한 극단이 보여주었다고 하면 내 말을 신뢰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랬다. 정말로 뛰어난 배우들의 정말로 한국적이고 훌륭한 공연이었다.
임유진<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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