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30-31> 서울 암사동에서 나온 세모형 빗살무늬토기. 왼쪽 25.9cm, 오른쪽 20.8cm, 국립중앙박물관. <사진32-33> 서울 암사동에서 나온 빗살무늬토기 조각, 국립중앙박물관. <사진34> 암사동 빗살무늬토기 삼각형 구름. 국립중앙박물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나온 지 벌써 94년째 되어간다. 그 오랫동안 우리는 빗살무늬의 뜻을 풀지 못했다. 8000년 신석기인의 세계관을 ‘기하학적 추상무늬’라 하고 ‘생선뼈무늬’라 했다.

본보는 수 차례에 걸친 기획을 통해 세계 신석기 그릇 문화사 속에서 한반도 신석기 빗살무늬의 비밀을 풀어 보고자 한다. 한반도 빗살무늬의 비밀을 푸는 일은 한국·중국·일본·베트남 신석기인의 세계관에 한 발짝 다가가는 일이고, 그와 더불어 세계 신석기인의 세계관을 그리는 일이기도 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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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 신석기 빗살무늬토기의 무늬를 본격으로 해석하기 전에 세계 신석기 문양학자 아리엘 골란의 문제틀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러시아 문양학자 아리엘 골란이 위 <사진30, 31> 세모형 빗살무늬토기 두 점을 봤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는 우리가 94년째 ‘기하학적 추상무늬’ ‘생선뼈무늬’라 했던 것을 단 10초 만에 풀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하늘 속 통로’(<사진33>)나 그릇에 뚫은 ‘구멍’(<사진30, 32>)만큼은 곧바로 풀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 구멍은 금이 가거나 깨진 그릇을 수리해 쓰려고 뚫은 구멍이 아니다) 이것은 중국과 한국의 ‘천문(天門)’과 ‘기(氣))’를 모른다면 미궁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 속 통로와 그릇에 뚫은 구멍은 이 시리즈 말미에 자세히 밝힐 것이다) 그런데 ‘하늘 속 통로’와 ‘구멍’까지 풀었다 하더라도 그는 나와 다르게 결론을 내릴 것 같다.

 아리엘 골란이 쓴 ‘선사시대가 남긴 세계의 모든 문양’을 보면, 그에게 “문양은 종교적 개념이 도식적으로 형상화된 상징”이다. 그것은 반드시 어떤 ‘숭배’와 관련된 것이고, 그래서 문양은 숭배적 ‘상징’이고 신석기 시대의 ‘종교’가 된다.

그의 신석기 문양 연구의 목적은 “상징을 매개로 표현된 종교적 신앙을 복구하는 것”이다. 그는 신석기시대에 ‘종교’가 분명히 존재했다고 보고, 그 종교는 초기 농경문화가 있었던 근동과 동남유럽 지역에서 공통적이었을 것으로 본다.

그는 프랑스 종교학자 프르질루스키(Przyluski, J. 1885-1944), 리투아니아 출신 고고학자 마리야 김부타스(Marija Gimbutas. 1921-1994) 같은 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신석기 문양 가운데 수직 직선, 지그재그 선, 물결선이 ‘비’(<사진30, 31> 참조)를 뜻할 뿐만 아니라 비를 관장하는 ‘하늘여신’으로 본다. 또 그 비를 ‘농경’과 관련짓는다.

그는 러시아 역사학자 리바코프(Rybakov, B. 1908-2001), 고고학자 김부타스가 그랬듯 반타원을 ‘구름’으로 본다(<사진31> 참조). 그리고 고대 상징에서는 곡선이 꺾인 선으로 바뀌듯 ‘반타원’이 ‘삼각형’으로 변한다고 한다(<사진30, 34> 참조). 그는 아마 이렇게 결론을 내릴 것 같다.

암사동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 ‘농경의 시작’과 더불어 중요해진 ‘비’를 표현했고, ‘하늘여신’에게 비를 염원하는 신석기 종교 문양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구멍’은 여신의 수태와 관계있고, 그로부터 더 많은 신이 태어났을 것이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사진35-36> 아리엘 골란이 쓴 ‘선사시대가 남긴 세계의 모든 문양’(정석배 옮김, 푸른역사, 2004) 표지와 본문 도상 그림. <사진37-38> 마리야 김부타스가 쓴 ‘여신의 언어’(고혜경 옮김, 한겨레출판, 2016) 표지와 본문. 이 두 책에는 중국, 한국, 일본 신석기 무늬를 살펴보는 데 아주 중요한 실마리가 담겨 있다. 서양 문양학자들은 신석기 무늬를 기호(symbol)로 읽는다. 반면에 우리는 그림(像型)으로 읽는다. 이것은 소리글자 문화와 뜻글자 문화권의 차이일 것이다.
 
▲아리엘 골란이 놓치고 있거나 잘못 잡은 신석기 문제틀
 
 아리엘 골란은 유럽과 근동 지역 고대 상징을 이해하는 데 중국의 신석기 문양은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 말은 똑같이 그에게도 해당된다. (서양 문양학자들은 중국 신석기인이 그릇에 그린 ‘그림(像型)’을 기호(symbol)로 읽는다) 우선 우리 빗살무늬토기는 ‘하늘여신’과는 관계가 없다.

또 ‘초기’ 암사동 신석기인이 새긴 빗살무늬는 농경이나 ‘비(雨)’보다는 ‘하늘 속 물(水)’에 대한 공포와 관련이 깊다는 것을 먼저 지적할 수 있다. 그도 그렇듯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에 올라온 빗살무늬토기 사진 자료 1669장에는 달, 해(태양), 별 무늬도 없었다. 그리고 사람(인간)과 신석기인의 삶(농경의 흔적)도 새기지 않았다.

 세계 신석기인들은 농사를 짓기 전부터 비와 구름을 그릇에 새겼다. 그런데 세계 신석기 그릇 가운데 서울 암사동 신석기인처럼 하늘 속 물 층을 <사진30-33>처럼 섬세하게 새긴 그릇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구석기 홍적세 때 겪었던 물과 홍수에 대한 공포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어쩌면 그들은 지금의 황해, 신석기 이전에는 뭍이었던 중국 산둥반도와 인천 사이 어디쯤에 살았던 구석기인이었을지 모른다.

특히 암사동 신석기인의 ‘하늘 속 통로’는 황해북도 지탑리와 함경북도 서포항 빗살무늬토기에서만 볼 수 있고, 한강 아래 신석기 유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충분히 하나의 가설로 세울 수 있다.

구석기 말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간빙기가 시작될 때 지금은 바다이지만 서쪽 육지가 물에 잠기자 한 무리는 중국 동북 쪽 랴오허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고, 다른 한 무리는 동쪽 한반도 암사동으로 삶터를 옮겼을지 모른다.

그리고 또 한 부류는 황해북도 지탑리로, 거기서 다시 위로 함경북도 서포항까지 올라갔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김찬곤 <광주대학교 초빙교수>

기원전 1만 4천 년 전 한반도와 중국·일본은 이렇게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동해는 바다가 아니고 커다란 ‘호수’였다. 위 지도에서 ‘후기 구석기인(또는 초기 신석기인)’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은 강이 흘러 바다와 만나는 지점(빨간 동그라미)이다. 이곳은 ‘갯벌’이 발달해 먹을 것이 넘쳐났다. 하지만 이때는 홍수가 잦았던 홍적세 말기(그도 홍수가 가장 심했던 적도 지방), 거기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얼음이 녹는 간빙기였다. 유럽 고고학자들은 조그만 호수 흑해에 물에 찰 때 하루에 120미터씩 뭍이 잠겼다고 한다. 아마 이곳 갯벌 지역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구석기인들은 서둘러 남쪽 베트남, 동쪽 일본, 북쪽 제주도로 몸을 피했을 것이다. 거기서 한 무리는 다시 부산 동삼동 쪽으로, 다른 무리는 지금의 서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동해(그때는 호수) 서쪽에 살았던 구석기인(또는 초기 신석기인)들은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서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되었다. 같은 빗살무늬토기라 하더라도 제주도, 서남해안, 암사동, 동북지역 토기의 무늬가 다른 것은 바로 이 같은 사정 때문이다. 특히 제주도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빗살무늬를 푸는 데 아주 중요한 실마리를 담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연재글 말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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