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노동자들도 파업”
역사와 함께 한 노동, 역사교육이 필요한 이유

 노동의 사전적 정의는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주로 몸을 쓰거나 머리를 써서 힘들여 하는 일’이다. 노동의 어원을 찾아보면, 고전 히브리어로 쓰여진 구약성경 타나크의 ‘아바드’·‘아말’·‘아사’, 고대 그리스어 ‘포노스’, 라틴어 ‘라보르’가 있는데, 이들은 섬김, 수고, 슬픔, 고통이 수반되는 극도의 노력이라는 뜻이고 14세기에는 ‘labour’가 영어로 최초 등장한다. 중세 독일어 ‘arbeit’는 ‘꾸역꾸역 하는 일’, ‘고된 일’, ‘고통을 안겨주는 것’이었고, 프랑스어 ‘travailles’의 어원은 라틴어 ‘tripalium(로마군이 사용했던 고문 도구의 일종으로 세 개의 말뚝)’이다.

 고대 이집트 유물로 발견된 일명 ‘토리노 파업 파피루스’에서는 고대 이집트 신왕국 제20왕조 람세스 3세의 재위 29년 일어난 노동자들의 파업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의 대강은 ‘피라미드를 만들고 있던 노동자들이 급료가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던 것에 항의했다’는 것인데 인류 최초로 기록된 파업이라 한다. 노동조합이 생겨나고 쟁의행위로 근로제공을 거부하는 헌법상 기본권 측면에서 이것은 현대의 시대상황과 거리가 있지만 과거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여 노동의 말뜻을 역사적 맥락으로 이해하고 그 사회적 관계를 파악하므로서 진일보한 사회의 밑거름이 된다면 그 의미가 만만치 않다고 본다.

 ‘서구의 종교나 사상, 정치권력에 나타난 ‘노동’·‘자본’의 상관관계를 찾기 위해 성경과 함께 한 종교개혁, 유대민족의 이동경로,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을 알아보는’, ‘고리대금이 급기야 금융산업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변화발전 된 자본의 양상을 살펴보는’ 역사공부는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면면히 흘러온 ‘노동개념’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활동일 것이다. 왜냐하면 ‘노동’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물처럼 흐르는 시간 속 역사적 사건과 연계하여 살펴볼 때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고 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와 3차 산업혁명을 훨씬 뛰어넘어 이전과 상상할 수 없는 변화에 직면할 것이라며 노동의 종말이나 그 미래의 암울함을 꺼내는 사람들이 있다. 근대 이전 고통스런 노동을 창조적 생산의 노동개념으로 탈바꿈시킨 자본주의적 ‘노동’이라는 점에서는 이의를 달지 않았다던 ‘노동’진영과 ‘자본’진영, 그리고 이들의 싸움이 펼쳐진 대량생산·대량소비 시대가 이제 역사의 한편을 장식하는 유물에 불과할 것이라 주창하는 사람들은 앞으로의 시간을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디지털 시대로 이름짓고 새로운 ‘노동개념’을 부추기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서구 자본주의는 일본·미군정기를 거쳐 이식되었고, 소군국주의가 잉태시킨 재벌 자본주의는 세계화에 편승하며 그것을 능가한 신자유주의로 세계 어디보다 앞선 극단적 양극화를 초래했다. 소군국주의가 형식적으로 물러난 시절에도 이미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한 세기가 된 듯했고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훨씬 더 나이가 많았지만, 그 자본주의가 이식되기 시작한 구한말 조선시대의 ‘노동개념’에 대한 연구는 20세기를 넘기고서야 우리에게 일어난 움직임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바라 본 서구 자본주의에 담긴 ‘노동개념’은 기껏 민족적 혹은 국가적 부흥을 위한 애국계몽주의에 불과하지는 않았는가.

 때문에 ‘노동’과 ‘자본’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대립할 수 밖에 없는 영역이고, 그 대립을 달굼질 할 ‘노동’인권교육의 필연적 결부로서 역사교육은 ‘노동개념’의 제대로 된 자리매김을 위해 필요한 정책 과제를 떠안아야 한다고 본다.
홍관희<민주노총 법률원 공인노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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