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한 모녀 관계 그린 여성 2인극
어머니는 모성 속박과 싸우고,
딸은 그런 어머니를 증오하다

▲ 연극 ‘마요네즈’ 한 장면.<극단 ‘청춘’ 제공>
 2018년에 마지막으로 본 연극은 극단 ‘청춘’의 ‘마요네즈’였다. 새해를 나흘 남겨둔 12월27일 목요일이었다. ‘마요네즈’는 1997년 제2회 문학동네 신인작가상을 수상한 전혜성 작가의 동명소설이 원작이다. 소설은 1999년에 역시 동명의 영화로 제작됐다. 김혜자가 어머니 역을 했고, 지금은 고인이 된 최진실이 딸 역을 맡았다. 전혜성의 소설은 당시만 해도 세인들에게는 놀라움을 안겨준 어머니 캐릭터 때문에 인구에 꽤 회자됐던 작품이다. 전통적으로 어머니 하면 떠오르는 희생과 헌신, 무한한 사랑, 이런 것들과 좀 거리가 먼 어머니 캐릭터가 신선했기 때문이다.

 딸만 셋인 나는 어머니와 딸의 이야기가 중점인 작품 ‘마요네즈’가 자못 기대됐다. 아직 막이 오르기 전 무대를 바라보는데 유별나게 가슴이 뛰었다. 이제 여기에서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까? 장소는 거실이었다. 어머니와 딸만 나오는 여성 2인극다운 무대라는 생각이 들었다.(여성 2인극 무대가 거실이 아닌 다른 장소라면 어떨까?) 한가운데 소파와 낮은 탁자가 있고, 무대 왼쪽에 책상과 의자가 있었다. 책상 위에 노트북이 있는 것으로 봐서 딸의 공간일 것 같았다.(만약 이 공간이 어머니의 공간이라면 어땠을까?) 무대 오른쪽에는 싱크대와 냉장고가 있었다.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속박당하는 여성
 
 ‘마요네즈’라는 소설도 읽은 적이 없고, 동명의 영화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이 연극이 어머니와 딸만 나오는 2인극이라는 사실을 들으면 연극에 대해서 어떤 선입관을 가지게 될까? 아들만 낳았다고 해도 결국에는 그 자신이 누군가의 딸이고 어머니에게서 나왔으므로 모녀간의 관계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가정할 때 그 관계가 때로 지옥을 방불케하는 투쟁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지 않을까? 연극 ‘마요네즈’는 바로 그런 모녀간의 처절한 관계를 그린 연극이다. 어머니는 처음부터 어머니가 아니다. 누군가의 딸, 그리고 그 자신으로 살다가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부터 비로소 어머니가 된다. 딸은 이 세상에 태어나 보니 누군가 자기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는데 그 사람이 어머니다. 당연히 이 둘의 존재는 상충하게 되어 있다. 어머니라는 역할을 처음 해보지만 너무나 당연한 듯이 해내야 하는 존재. 먹이고 입히고 돌봐주는 존재(어머니)가 자신에게 늘 같은 질량과 부피의 사랑을 줘야 한다고 느끼는 존재(딸).

 꼭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이 지구에 있는 인간들 세상 어디에서도 인간들은 어머니에게 절대적으로 한 가지를 요구한다. 지극한 모성애. 그 모성이라는 이름이 한 여자를 얼마나 속박하는지 억압하는지 사람들은 간간이 잊는다. 어머니가 된 여자 그 자신도 그것을 잊을 때가 많다. 어머니(모성)라는 이름 하에만 자신을 규정하면서 자신의 삶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여자들이 있다. 어머니가 아닌 다른 존재, 자기 자신으로서 우뚝 서고 싶다는 욕망을 가진 여자들은 가끔 모성이 너무 버겁다. 연극 ‘마요네즈’가 자아를 찾으려고 하는 어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라고 전적으로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 연극에 나오는 어머니는 질서 지어진 사회 속의 틈새를 비집고 나오려고 애쓴다. 그런 노력의 일환에 우리가 알고 있는 소스의 한 가지인 마요네즈가 있고, 바로 그 마요네즈 때문에 딸 아정은 어머니를 싫어하고 증오하게 되었다.

연극 ‘마요네즈’ 한 장면.<극단 ‘청춘’ 제공>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어머니는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살았다. 사랑을 못 받는 것까진 그렇다 치고 술을 좋아하는 이 남편은 툭하면 부인을 때렸다. 그 남편이 병으로 거동을 못하고 자리보전하고 누워 있게 되었을 때 이 어머니(한 여자)는 얼굴에는 콜드크림을, 머리에는 마요네즈를 바르고 남편의 더러워진 기저귀를 갈아준다. 이 대목에서 소설의 문장을 잠깐 빌려서 그 상황을 묘사하면 이렇다. ‘그래, 마요네즈였단 말이지. 머릿속에서 똥무더기에 짓이겨진 아버지의 곰팡이 핀 엉덩이와 마요네즈를 짓이겨 바른 엄마의 새치 돋은 검은 머리가 찰흙반죽처럼 혼합되고 있었다.’
 
▲“그래, 마요네즈였단 말이지…”
 
 이 연극은 어떤 관점에서는 프랑스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의 이론을 들이대기에 딱 좋은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라캉에 의하면 인간은 어머니(이 때의 어머니는 딱히 생물학적 어머니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와의 합일이 중요한 상상계에서 아버지의 법(사회적 질서)이 중요한 상징계(현실)로 넘어가는데 성장이나 발전의 의미라기보다는 분열(쪼개짐)의 상태가 되는 거고 그 상태에서 또 실재계의 끊임없는 간섭을 받는다. 이 실재계는 상징계 너머에 있는 어떤 다른 세상이 아니고 상징계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는데 상징계의 틈새로 분출되는 세상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자기를 버리고 재취자리로 시집을 간 어머니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산 아정의 어머니에게 마요네즈는 일종의 실재계로 나아가려는 몸부림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연극 ‘마요네즈’ 한 장면.<극단 ‘청춘’ 제공>

 극단 ‘청춘’의 ‘마요네즈’는 딸 아정이 붉은색 목도리를 손에 들고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목도리는 어머니가 준 것이고 서로 싸우고 증오하면서도 결국엔 목도리색 만큼이나 진한 피의 정을 느낀다고 해야 할까. 연말에 하는 가족극이 더 이상의 결론을 낼 수 있었을까“ 어머니역의 배우는 열연을 했다고 봐야겠다. 문제는 딸 역이었는데, 처음에는 어머니와 딸이 저럴 수 있지 정도의 연기를 무난하게 보였지만 뒤로 갈수록 이 두 사람의 갈등은 어떻게 하다가 왜 지경까지 왔는지 궁금할 정도로 같은 톤의 연기가 지속되었다.

 여성 2인극에 어머니와 딸만 나오는 연극 중 하나인 마샤 노먼의 ‘잘 자요, 엄마’에 나오는 대사 하나를 인용하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극 중 엄마의 대사다. ‘내가 세탁기 하나 제대로 쓸 줄 모를까 봐? 빨래 집어넣고, 하이타이 풀고, 스위치 넣고, 기다리기만 하면 땡이지.’(‘잘 자요, 엄마’, 마샤 노먼, 신은수 역, 1992년, 예니) 아마 이 희곡이 번역되었던 1992년에는 ‘하이타이’라고 하면 관객들에게 충분히 공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한 세제 회사에서 나온 브랜드명을 그대로 썼을 것이라고 유추해본다. 하지만 만약 지금 이 희곡으로 공연을 한다면 ‘하이타이’ 대신 ‘세제’라는 단어를 써야 하지 않을까? 어머니와 딸의 갈등과 화해라는 주제는 영원한 것이지만 1997년에 나온 소설을 가지고 2018년에 연극을 할 때에는 주제에 맞추어서 좀 더 과감한 각색이 필요했다고 본다.
임유진<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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