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백자 자라병과 암사동 신석기인의 천문 세계관

▲ 〈사진71〉 백자 청화칠보난초문 병. 조선 18세기. 높이 21.1cm. 보물 제1058호. 청화백자 초화문표형 병(표형(瓢形 표주박표·모양형)은 호리병박을 말한다), 백자 청화난초문 표주박모양 병, 백자 청화 꽃무늬조롱박모양 병이라고도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진72〉 백자 상감모란잎문 편병. 조선 15세기. 높이 23cm. 보물 제791호. 덕원갤러리. 국립중앙박물관·덕원갤러리.
 ▲조선백자와 암사동 신석기인의 천문(天門) 세계관
 
 <사진72>를 보면, 가운데에 두 겹 원이 있고, 덩굴손 같은 선이 세 가닥 나오고 있다. 그리고 테두리 세 겹 원에서 풀꽃 잎이 세 군데서 나온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풀꽃을 모란으로 보아 왔지만, 알다시피 모란은 ‘덩굴손’(오른쪽 위 풀꽃 잎)이 없고 잎 모양도 위 그릇 무늬와 다르다. 이 병은 조선 백자인데도 고려시대 상감기법으로 무늬를 새겨 넣었다. 이런 모양 병을 흔히 편병(扁甁 넓적할편·병병)·납작병이라 하고, 자라를 닮아 ‘자라병’이라 한다. 15∼16세기 청과 조선에서 이런 모양 병이 유행했는데, 그 내력은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나는 그 기원을 막새기와 수막새, 그 가운데서도 천문(天問)을 표현한 수막새 기와(<사진79>)와 《육서통(六書通)》(1661)의 천(天) 자(<사진78>)에서 찾고 싶다.

 <사진71>은 청화백자인데, 칠보와 난초를 그렸다고 해서 ‘백자 청화칠보난초문 병’이라 한다. 201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낸 도록 설명글을 보면 위쪽 호리병 몸통에 그린 무늬를 엽전무늬 ‘전보(錢寶 돈전·보배보)’라 밝혀 놓고 있다. 그러니까 일곱 가지 길상무늬 가운데 하나인 ‘돈’ 무늬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전보가 엽전을 그린 것인지는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 무늬는 전보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칠보(七寶) 개념을 다시 세워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칠보는 불교 경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나 경전마다 일곱 가지 보배를 달리 들고 있다. 또 공예에서 쓰는 칠보가 있는데, 이는 또 불교의 칠보 개념하고는 다르다. 이렇듯 우리 문양에서 칠보 개념은 아주 복잡하고 뚜렷하게 정리가 안 되어 있는 형편이다.

 나는 이 무늬를 엽전으로 보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거기에서 나오는 구름과 사방 동서남북에 있는 작은 동그라미 원을 설명할 수 없다. 이 무늬는 <사진72>와 마찬가지로 구름이 나오는 천문(天門)이고, 천문 속에 있는 네 호(弧 활호)는 신석기 암사동 빗살무늬토기와 청동기 동경에서 볼 수 있는 반타원형 구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아래 팔각 몸통에 그린 것은 난초인데, 이것을 난으로 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병에서 위 둥근 몸통 호리병은 하늘을 뜻하고, 아래 팔각 몸통은 팔방(八方) 여덟 들판 세상을 뜻한다. 즉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세계관으로 볼 수 있다.
 
▲보주(寶珠)와 영기문(靈氣文)의 기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사진72>의 설명글을 보면, 가운데 원을 ‘이중 원’으로 보고 거기서 덩굴무늬 ‘당초문’이 나오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이 무늬는 단지 이중 원이 아니고, 또 단순한 덩굴무늬도 아니다. 이것은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 암사동 신석기인이 빗살무늬토기에 새긴 ‘천문(天門)’에서 시작된 무늬로 볼 수 있다. 위 두 그릇에서 핵심 무늬는 원 무늬이다. 이 두 원 무늬가 품고 있는 뜻은 본질적으로 같다. 다만 <사진72>의 무늬가 <사진71>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미술사학자 강우방 선생이 <사진72>를 보면 어떻게 보실까. 선생의 문양 이론에 따르면, 가운데 동그란 원은 ‘보주(寶珠 보배보·구슬주)’, 세 가닥 덩굴손은 ‘영험한 기운 영기문(靈氣文)’이고, 이 보주와 영기문에서 이 세상 ‘만물’(이 그릇에서는 풀꽃 잎으로 표현했다)이 태어난다는 ‘보주·영기화생(寶珠·靈氣化生)’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이 보주와 영기문의 ‘기원’을 찾아야 한다. 그랬을 때 <사진71>의 가운데 큰 천문(天門) 둘레 동서남북에 있는 작은 원(천문)의 정체와 이 천문에서 나오는 구름도 비로소 해석할 있는 것이다.

<사진73> 평안남도 온천군 운하리 궁산유적(기원전 6000년∼4000년)에서 나온 새김무늬토기 조각 그림. 조선유적유물도감1. <사진74>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유적(기원전 3000년)에서 나온 새김무늬토기. 북한 사학계는 빗살무늬라 하지 않고 ‘새김무늬’라 한다. 조선유적유물도감1.|||||
 
▲암사동, 궁산, 지탑리, 능곡, 까치산패총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에 올라온 서울 암사동 편 빗살무늬토기 사진 자료 474장에서 ‘하늘 속 물’에 낸 통로(天門)를 볼 수 있는 그릇이나 조각은 156점이다. 이것은 암사동 빗살무늬토기의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하다. 부산 동삼동 편 빗살무늬토기 사진 자료 179장에서는 단 한 점도 찾을 수 없었다. 경기도 편 빗살무늬토기 사진 자료 203장에서는 1점, 인천광역시 편 빗살무늬토기 사진 자료 533장에서는 6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3점은 암사동 것이었다. 경기와 인천에서 나온 그릇 조각에는 암사동 것이 간간이 섞여 있다. 암사동 것은 진한 밤빛에 무늬가 섬세해 다른 것 사이에 있으면 바로 알아볼 수 있다.

 북한의 ‘조선유적유물도감1’(1988)을 살펴보니 평안남도 온천군 운하리 궁산유적에 두 점(<사진73>),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유적에 넉 점(<사진74>)이 있었다. 또 경기도 시흥 능곡동 선사유적(기원전 4000년)과 인천 대연평도 까치산패총(기원전 3000년)에서 나온 빗살무늬토기 조각에서도 몇 점 확인할 수 있었다.
김찬곤 <광주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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