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벽녀’ 여자, 그가 만났던 남자 3명
사랑에 대한 깨달음 통해
‘현명한 서른’으로
 

▲ 연극 ‘S다이어리’.<기분좋은극장 제공>
 광주광역시에 사는 연극인구에게는 불행한 일인지 모르겠다. 날씨가 추운 1월과 2월에는 공연 무대가 별로 없다는 것이 말이다. 그런 가운데 꾸준히 무대를 준비하는 집단이 있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다행한 일일 것이다.

 선택권이 없는 필자는 상무지구에 위치한 ‘기분좋은극장’으로 갔다. 그동안 ‘기분좋은극장’을 운영하는 강용복 대표가 주장했던 ‘대중극’, 세인들이 말하는 ‘상업극’은 되도록 피해서 공연을 보고자 했던 나에게 ‘S다이어리’는 그런 의미에서 ‘계륵’같은 것이었다. 1월19일 비 내리는 토요일 오후였다.

 극장이 있는 건물에서는 연극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주차할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짜락거리며 비는 오지, 공연 시간은 임박했지, 갓길 주차를 할 수는 없지(사실 하려고 해도 이미 차들로 가득 차서 실제로 할 수가 없었다)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유료 주차장을 찾아서 간신히 주차를 한 후 극장에 도착했다.

 주차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극장 측에 전화를 넣어두었던 차라 안내인이 내가 가자마자 지각생들을 위한 통로를 개방해서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아직 무대 시작 전이었다.

 일정 구간을 놓쳐도 돌려보면 되는 영화나 드라마와 달리 연극은 그 날 그 시간을 놓치면 그만이기에 마음을 잔뜩 졸였던 필자는 상업극이고 대중극이고 필요 없이 연극을 처음부터 제대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고마울 뿐이었다. 생각보다 관객수가 좀 되었다.

 비오는 겨울 토요일 오후에 연극을 보러 온 사람들이 다 이뻐 보였다. 무대 시작 전 관객들과 이런 저런 소통을 하고 있던 배우도 나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보낸 것이 아니었을 텐데도 고맙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연극 ‘S다이어리’.<기분좋은극장 제공>
 
▲애드리브·순발력… 돋보인 ‘멀티’들
 
 ‘S다이어리’는 이제 서른에 접어드는 한 20대 후반 여자의 연애기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녀에게는 지금까지 세 명의 남자가 있었는데, 첫사랑에 실패하고 두 번째 사랑을 할 때까지 마음의 문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 두 번째 사랑은 역시 그녀에게 상처만을 남기고 떠난다. 이후 주인공은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여러 남자를 전전하며 즐기는 것으로 연애관을 바꾼다. 그리고 그 와중에 그나마 마음을 주었던 연하남에게 배신을 당하고 이제는 정말 철벽녀가 되어 살아간다.

 기획형 연극답게 ‘S다이어리’에는 총 네 명의 배우가 나온다. 남자 배우 두 명과 여자 배우 두 명인데 주인공 여자를 빼면 나머지 세 명은 거의 멀티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멀티를 하는 배우들은, 특히 이런 기획형 로맨틱 코미디에서 멀티를 맡는 배우들은 연기스킬이 뛰어나다. 그들은 애드립에도 강하고 순발력도 뛰어나며 무엇보다도 관객을 즐겁게 한다.

 이번 ‘S다이어리’에서는 주인공의 절친 역을 맡은 여자 배우와, 15세 소년부터 할머니까지 다양한 변신을 행한 한 남자 배우가 특히 멀티로서 돋보였다.

 ‘S다이어리’는 제목부터가 샤론 맥과이어 감독의 2001년작 영화 ‘브리짓 존스의 일기’를 떠오르게 했다. 총 3편까지 제작되어 아무도 감히 예상하지 못했던 흥행을 이루어낸 ‘브리짓 존스’시리즈는 사랑, 특히 사랑에 목마른 여성들의 성과 사랑, 결혼에 대해서 거의 정석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물론 사유를 더 확장하면 미국의 급진주의 페미니스트인 케이트 밀레트가 자신의 박사 논문을 근간으로 1969년에 펴낸 ‘성(性)의 정치학’까지 확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진지한 사유를 방해하는 것은 개그콘서트를 방불케하는 가볍고 재미있는 무대와 관객들의 현장반응이었다.

 고등학교 때 만난 주인공의 첫사랑 오빠는 주인공이 납득하기 힘들게 제멋대로 주인공에게 실연의 상처를 안긴 후 툭하면 술 먹고 주인공을 찾아와서 ‘오늘만 같이 있자’라고 한다. 그 때 여성 관객들이 보인 야유와 개탄의 한숨소리는 급진적인 페미니즘 이론이 끼어들 여지를 철저하게 봉쇄한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마당극처럼 해학과 풍자로 넘치는 난장의 연극을 보면서 관객들은 깊이 몰입해 반응했다. 그들에게는 연극 속 주인공의 현실이 곧 자신의 현실이었던 것 같다.

연극 ‘S다이어리’.<기분좋은극장 제공>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에 대해
 
 ‘S다이어리’는 마지막에 아주 교훈적으로 막을 내린다. 남자들에게 배신당하고 상처만 안은 채 철벽녀로 살아가던 주인공은 자아정체성을 남자들과의 사랑에서 찾지 않는, 제대로 된 사랑을 하기 위해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깨닫는 현명한 서른이 된다.

 이런 동화 같은, 이솝 우화에나 나올법한 결말이 맘에 들지 않았는지, 주인공에게 깊이 집중했던 관객은 마지막 10분은 졸렸어, 라고 말했다. (나는 공연이 끝난 후 그 관객과 같은 엘리베이터에 탔고 본의 아니게 그녀의 말을 들었다.)

 기획형 로맨틱 코미디는 당의를 입은 쓴 약 같은 것일까? 아니면 그냥 ‘MSG(인공조미료)’를 잔뜩 쳤다는 것을 만든 사람도 알고 먹는 사람도 아는 값싼 주전부리 같은 것일까? 보는 순간에는 말초적 재미가 있어서 시간이 순삭되지만 본 후에는 씁쓸한 이런 무대는 과연 대중들이 연극 무대를 찾는 통로의 역할을 할까, 아니면 그런 무대만 보게 만드는 약한 중독이 될까?

 늘 느끼는 거지만 배우들은 정말 최선을 다했고, 작가는 기획팀의 입맛에 맞춰 열심히 썼다. 그리고 적어도 공연 시간 동안 관객들은 즐거웠다. 그걸로 된 것일까? 케이트 밀레트까지 밀려나갔던 나의 머리 아픈 사유는 그저 내 몫인가? 2018년에도 그랬는데 난 이번에도 더 유예를 해야 할 것 같다. 다양한 연극을 좀 더 보고 내려야 할 결론이다. 그래서 난 2019년에도 계속 연극을 볼 생각이다.
임유진<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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