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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진의 무대읽기]연극 ‘한뼘사이’
얽히고설킨 사랑 다룬 로맨틱 코미디
개연성의 빈틈, 흥으로 채운 ‘멀티맨’ 강렬
임유진
기사 게재일 : 2019-02-11 06:05:01
▲ 연극 ‘한뼘사이’ 한 장면.<동산아트홀 제공> 

 지난 8일 금요일 유스퀘어 안에 있는 ‘동산아트홀’로 연극을 보러 갔다. 전에 같은 극장에서 연극을 봤다가 그 공연의 질과 가격에 놀란 적이 있었기에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제목은 ‘한뼘사이’.

제목에서도 느껴지듯이 역시 로맨틱 코미디였고, 가격은 기존 극단의 배나 되는 4만 원이었다. 예상과 달리 관객 수는 좀 되어 보였고, 커플들 말고도 나이 드신 어른신들도 있었다. 명절 동안 기름진 음식과 끈적한 인간관계에 지친 사람들이 가볍게 볼 수 있는 유흥거리를 찾은 것인가 라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한 장짜리 리플릿에는 ‘대학로 대표 로맨틱 코미디’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무대를 살펴보는데 리플릿에 있는 그 문구가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에서 자본의 냄새가 났다. 무대에는 301호부터 304호까지 네 개의 문이 있었는데 문에는 모두 번호키로 된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무대 왼편에는 벚꽃나무로 추정되는 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303호와 304호 사이에는 창문이 하나 있었는데 벚꽃 나무가 조금 내다 보였다. 전반적으로 공들여 제작한 세트의 기운이 느껴졌다. 무대에 돈을 들였다는 것은 돈 내고 연극을 본 관객이 많았다는 것이고, 그러면 대표적인 로코(로맨틱 코미디)라는 말을 쓸 만큼의 자부심이 있겠다도 싶었다.
 
▲시설 좋고 고급스러운 무대 연출
 
 또 이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는 총 다섯 명이었는데 로코답게 남자 둘, 여자 둘이었고 멀티로 나오는 남자 배우가 한 명 더 있었다. 배우에게 주는 돈을 줄이려고 생각했다면 네 명의 배우들 중에서 한 명의 역할을 축소하고 멀티를 맡겼을 텐데 멀티용 배우를 따로 쓴 것이 역시 관객 수가 좀 되는 연극인가보다 싶었다.

연극의 기본 포맷은 강력부 여검사와 이혼 전문 변호사, 그리고 여기자와 범죄자 출신의 남자의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 여검사가 맡은 사건과 범죄자가 얽혀 있고, 여기자 또한 얽혀 있다.

 같은 대학 같은 과 선후배 사이인 여검사와 검사 출신 변호사의 사랑은 극의 말미에나 가서야 어렵게 이루어지는데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잘 모르고 오해하며 쉽게 용기내서 고백을 못하는 성격 탓이다.

 반면 여기자는 자기를 청부살인하려고 했던 범죄자와 사랑을 이루는데 관객이 그 개연성에 대해서 생각할 틈도 없이 너무나 쉽게 그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관객도 순식간에 그 사랑을 인정한다. 그 범죄자가 자수를 하는 과정, 회개하는 과정이 이 연극을 통틀어 가장 개연성의 부족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는데 아량 넓은 관객들은 그러나보다, 라는 심정으로 극을 보는 것 같았다.

연극 ‘한뼘사이’ 한 장면.<동산아트홀 제공> 

그도 그럴 것이 이 연극에서 부족한 개연성의 틈을 부지런히 메꾸고 다니면서 시종일관 폭소를 주는 멀티맨이 관객에게 진지하거나 심각한 생각을 할 여지를 전혀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멀티맨의 존재는 아주 강력하여 나중에 한 배우가 분명히 대본에는 나와 있지 않았을 대사를 치는 것을 들으면 그 날 이 멀티맨을 맡은 배우의 흥이 아주 많이 올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멀티맨이 정신없이 무대를 장악하고 있을 때 한 배우가 말한다. “오늘 왜 이렇게 업되었대?” 분명히 주인공은 네 명의 남녀 배우인데 마치 멀티맨이 이 극의 중심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멀티맨의 활약은 눈부셨다. 나중에 극이 끝난 후 중년의 한 남자 관객은 그에게 이름을 물어보기까지 했다.

 시설 좋은 극장에서 대본에 딱 맞는 고급스러운 세트 속에 열심히 한 만큼의 대가를 받으면서 하는 무대라면, 돈이 돈을 부르듯이 열심히 한 연기가 관객을 부르고 그만큼 돈이 되고 하니까 열심히 하겠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본 적이 있기에 그 멀티맨을 맡은 배우(온 정)와 그에 지지 않을 만큼 열심히 연기한 네 배우에게 박수를 보낸다. 이런 기획형 로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이지만 지난 금요일만큼은 나도 많이 웃고 즐겼다.

연극 ‘한뼘사이’ 한 장면.<동산아트홀 제공> 
 
▲‘로코’라는 장르, 관객과 연극사이
 
 18세기 이탈리아에는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라는 가면희극이 있었다. 대중적이고 배우 중심으로 흘러가는 연극이다. ‘한뼘사이’를 보고 나는 문득 이 오래된 형태의 연극을 떠올렸다. 대개 연인들이 등장하고 그 연인들의 결혼을 방해하는 인물들이 나오고, 그 와중에서도 가장 중심적인 역할은 자니(zanni)라고 불리는 하인들이다.

그리고 모든 여자 역을 남자가 연기했다. 코메디아 델라르테 형식의 공연을 하는 극단들은 효과가 이미 증명된 라찌(lazzi)라는 것들을 많이 갖고 있었다. 적당할 때 또는 관객의 주의가 산만해질 때 언제든지 우려먹을 수 있는 우스운 짓거리들을 확대한 토막들이었다.

 기획형 로맨틱 코미디들은 현대판 코메디아 델라르테인가 싶다. 많은 요소들이 비슷하다. 극단 이름이 없고 희곡을 쓴 작가 이름도 모르고 연출가도 알 수 없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

물론 지금의 로코들은 완전히 즉흥적으로 배우의 연기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가면을 쓰고 나오는 모든 코미디적 요소들을 갖춘 배우들을 ‘멀티맨’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로 몰아서 연기시키는 거며, 관객들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웃게 만드는 거며 비슷한 점이 많다.

코메디아 델라르테는 후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지금 이 시대의 이런 기획형 로코들은 어떤 점으로 평가받게 될까? 정말로 이런 연극을 본 관객이 연극의 두터운 팬층으로 흡수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냥 이런 연극만 찾아다니는 사람이 될까? 이런 로코들을 재미있게 본 관객과 연극(이라는 장르가)이 ‘한뼘사이’를 극복하고 결합할 수 있기를 나는 바란다.

그리고 또 기획형 로코가 아닌 연극을 올리는 집단에게도 자본의 세례가 쏟아져서 추운 겨울에는 움츠리고 봄을 준비하는 극단들이 상시 연극 무대를 준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로코 말고 다른 연극을 보고 싶어하는 나 같은 관객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임유진<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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