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회사를 명예롭게 나가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하는 자들 이야기

▲ 연극 ‘명예로울지 몰라-퇴직’.<유피씨어터 제공>
 3월3일부터 10일까지 ‘제4회 대한민국연극제’ 광주광역시 예선대회가 있었다. 출품된 작품은 총 4개. 극단 ‘진달래피네’의 ‘연극학 ‘개’론’이 3월 4일에, 극단 ‘시민’의 ‘내 안에 풍금’이 3월6일에 광주문화예술회관(문예회관) 소극장에 올라갔다. 이 두 작품을 비롯하여 당초 계획은 4개의 작품을 다 보는 거였지만 일단 나랑 연이 닿은 작품은 3월8일에 공연된 ‘명예로울지 몰라-퇴직’이었다. 극단 ‘유피씨어터’의 작품으로 이성호 연출이다.

 ‘명예로울지 몰라-퇴직’은 2017년 경상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김연민 작가의 ‘명예로울지 몰라, 퇴직’을 각색한 작품이다. 희곡에 등장하는 인물은 세 명이다. 40대 남자인 만년과장 김, 6년차 대리인 30대 남자 정, 그리고 입사 한 달 된 인턴 직원 남자 박이다. 무대에는 그 외에도 카페 여직원 한 명과 그 여직원의 친구이자 카페에서 알바를 하려고 찾아 온 여자 한 명이 더 등장한다. 카페 한 구석 자리에 취준생(취업준비생) 남자도 한 명 앉아 있었다. 마지막에는 카페 주인 남자도 잠깐 등장한다. 희곡에서는 세 명이었던 등장인물이 무대에서는 7명으로 늘어났다. 희곡에서는 정대리의 대사로 처리되는 부장의 대사가 목소리로 나온다는 점도 희곡과 다르다.

 무대 중간쯤 검고 얇은 베일이 내려와 있고, 그 안으로 가지만 남은 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문득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떠올랐다. 이 연극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명예로울지도 모르는 퇴직에 관한 연극인 것 같은데 저런 장치를 해서 관객에게 혼란을 주다니 이 연극의 추구하는 바가 궁금해진다.

연극 ‘명예로울지 몰라-퇴직’. 첫 장면은 김과장과 정대리, 박인턴이 관객에게 뒷모습을 보이며 서 있는 것이다.<유피씨어터 제공>
 
▲밟히지 않기 위해 남을 밟아야 하는

 첫 장면은 김과장과 정대리와 박인턴이 관객에게 뒷모습을 보이며 서 있는 것이다. 그들은 순서대로 돌아서서 자신이 회사를 중심으로 하는 자신의 삶에서 가지고 있는 고충과 괴로움 같은 것을 털어 놓는다. 셋 다 가슴에 사직서를 간직하고 있고, 회사를 곧 때려치울 것처럼 얘기한다. 회사에서는 멀쩡하게 일을 하고 있지만 속내로는 늘 퇴사를 생각하고 있는 인물들이다.

 본격적인 무대는 검은 휘장이 걷힌 곳에서 시작되었다. 카페였다. 휘장 뒤로 비쳐 보였던 나무는 카페에 있는 인테리어 중 하나였다. 박인턴이 커피를 마시고 있고, 잠시 후 정대리가 등장한다. 그들이 회식을 왜 카페에서 하는지 궁금해 하고 있을 때 김과장도 온다. 그들은 모두 부장에게서 연락을 받고 모였다. 그런데 부장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처럼.

 이 세 명은 결국 자신들 중 누군가 회사를 ‘명예롭게’ 나가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 옥신각신하게 된다. 그 와중에 카페 손님인 줄 알았던 여자가 사실은 알바를 구하러 온 사람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그나마 이미 알바를 하고 있던 여자의 대학친구다. 두 여자는 손님이 적은 카페의 알바 자리를 놓고 육탄전까지 한다. 처음부터 카페 구석 자리에서 노트북을 켜놓고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었던 취준생은 이 두 여자와 세 남자의 고성과 다툼 때문에 번번이 방해를 받는다.

 당연하게도 이 두 그룹은 서로가 서로에게 자리를 양보하라고 한다. 특히 같은 회사에 다니는 남자 세 명은 왜 자기는 회사에 남아야 하는지, 왜 그만두면 안 되는지 구구절절 설명을 한다. 이 연극은 의심에 대한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아무도 명예퇴직에 관한 명령을 내린 적도 받은 적도 없는데, 회식장소라고 알려진 카페에 셋만 단출하게 모여서 늘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문제, 이번엔 자기가 잘릴지도 모른다는 문제가 이 세 명을 의심 덩어리로 만든 것일까. 그렇다면 이 연극은 인간의 무의식, 뭐, 그런 것에 관한 연극일까.

 결론은 그런 연극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 연극은 정말로 명예퇴직에 대한 문제였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쫓겨나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들, 남이 비운 자리에 어떻게든 들어가 살아남아야 하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카페 구석 자리에서 취준생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새로운 경쟁 상대가 말이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 주는 메시지 따위는 사치인 세상이었다. 그들은 밟히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남을 밟고 있었다.

연극 ‘명예로울지 몰라-퇴직’.<유피씨어터 제공>
 
▲명예와 비루한 버티기, 씁쓸한 자화상

 누군가는 그들을 그렇게 만든 시스템에 대한 얘기는 없고 오직 개인적인 노력으로 그 모든 허점을 덮는 이 연극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했다. 끝없이 서로를 비방하고 네가 나가면 안 되겠니, 난 정말 안 된다, 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외치던 그들이 결론에 이르러서는 난 더 열심히 살 거야, 노력할 거야, 난 버틸 거야, 너도 그렇게 해, 라면서 갑자기 연대의식을 발휘하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명예롭지 못한 삶을 쉽게 매도할 수 있을까?

 놀라운 점 한 가지는 대사 중에 노조가 언급된다는 것이다. 노조원인 것 같지는 않은 그들은 노조가 회사를 이겨주길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가 노조보다 더 준비를 많이 해서 그럴 가능성은 없다고 한다. 그래도 언젠가는 노조가 이기기를 바라는 그들. 회사를 상대로 투쟁하기는 싫고 노조가 회사를 이겨서 생기는 이득에는 편승하고 싶은 그들. 정말 딱 소시민들 아닌가? 딱히 꼭대기에 오르려고 남을 밟는 것도 아닌, 그냥 그 자리에만 무사히 있으면 되는 그들. 그러니 나비가 되어서 꽃들의 희망이 되고 싶은 생각 따위 애당초 없는 그들이다.

 ‘명예로울지 몰라-퇴직’은 이 소시민들이 늘 가슴에 품고 사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명예보다는 삶이다. 구차하고 비루하지만 버티는 삶이다. 그들이 거대담론을 위해서 투쟁하지 않는다고 해서 누가 그들을 감히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정말로 자신을, 자신의 삶을 다 희생하면서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위인들 말고 말이다. 명예와 비루한 버티기 사이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시소를 타는 씁쓸한 소시민들의 자화상 같은 연극이었다. 그들에게 고도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은 행복 혹은 행복해질 거라는 희망 같은 것일지 모른다.
임유진<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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