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완벽한 비극, 2019년 대한민국서 소환
정해진 종말, 그럼에도 맞선 인간의 발버둥
 

▲ 연극 오이디푸스. 샘컴퍼니 제공
 고대 그리스에는 비극경연대회라는 것이 있었다. 술과 풍요의 신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축제에서 공연되었다. 처음에는 한 명의 배우가 가면을 쓰고 모든 등장인물을 연기하였다. 배우는 모두 남자였고, 그래서 여자역도 남자배우가 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기록으로는 세 명의 유명한 비극작가가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이 소포클레스다. 소포클레스는 100편이 넘는 작품을 썼다고 하지만 현존하는 것은 7편이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오이디푸스’는 종종 가장 완벽한 그리스 비극이라 불린다.(연극의 역사, 오스카 G. 브로켓, 프랭클린 J. 힐디 지음, 전준택, 홍창수 옮김, 연극과 인간)

 샘컴퍼니가 기획한 연극 ‘오이디푸스’가 광주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일찌감치 표를 예매하였다. 희곡으로만 접했던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를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기 때문에 기대가 되었다. 더구나 배우 황정민 씨가 주인공 오이디푸스를 맡았다. 영화에서와 달리 연극 무대에서는 어떤 연기를 선보일지 그것도 관극 포인트였다. 그런데 연극이 다 괜찮은데 황정민씨의 연기만 안 좋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직접 보고 판단해야지 그런 얘기는 믿을 것이 못 된다. 하지만 도대체 왜 그런 낭설이 돌아다니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는 했다.
 
▲주연 배우 연기에 대한 갑론을박
 
 그렇게 기대와 궁금증을 안고 3월16일 광주문화예술회관 대극장을 찾았다. 광주에서는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3일간 공연했는데 토요일 밤 7시 연극을 보러 갔다. 아주 먼 옛날 낯선 땅의 축제에서 경연작으로 출품되었던 작품을 현대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올릴 수는 없는 터. 과연 연출은 어떻게 이 대작을 만들어냈을까도 몹시 궁금한 사안이었다.

연극 오이디푸스. 샘컴퍼니 제공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이었다. 원래는 이웃나라의 왕자였는데 불길한 신탁을 듣고 집을 나와 여행길에 오른다. 그 신탁의 내용은 이러했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테베로 가는 길목에서 스핑크스를 만나게 된다. 얼굴은 인간 여자이나 몸은 사자이고 날개가 달려 있다. 스핑크스는 여행자들에게 수수께끼를 내서 맞히지 못하면 잡아먹었다. 아침에는 네 발, 낮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인 존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 수수께끼였는데 이것을 맞히는 사람이 없어서 테베에서는 곤혹스러워 하고 있었고, 테베의 왕 라이너스는 신탁을 들으러 길을 떠났다가 살해당했다. 결국 테베에서는 이 수수께끼를 맞히고 스핑크스를 물리치는 자에게 왕의 자리와 함께 왕비와 결혼하게 해 준다는 공고를 낸다. 오이디푸스는 간단히 이 수수께끼를 맞힌다. 답은 인간이었다.

 그렇게 해서 테베의 왕이 되고 라이너스의 왕비였던 이오카스테와 결혼하게 된 오이디푸스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고 행복하게 살게 된다. 그러다가 온 나라에 역병이 창궐하자 백성들은 궁궐로 몰려와 스핑크스를 물리친 영웅 오이디푸스에게 하소연을 한다. 희곡은 바로 이 장면으로 시작하나 이번 무대에서는 두 번째 장면으로 나왔다. 백성들이 나뭇가지를 들고 몰려 와 오이디푸스에게 고통을 해결해 줄 것을 하소연하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는데 백성들이 오이디푸스 왕을 압박하듯이 둘러싸고 대사를 했기 때문이다.


 역병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라이너스를 죽인 살해범을 찾아야 한다는 신탁을 받은 오이디푸스는 전왕 라이너스의 행적을 캐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예언가 테레이시아스도 왕비인 이오카스테도 들판에 버려진 아기 오이디푸스를 자기들의 왕과 왕비에게 가져다 준 이웃나라 양치기도 모두 오이디푸스를 만류하지만 오이디푸스는 멈추지 않고 진실을 쫓는다.

오이디푸스가 굴하지 않고 밝혀 낸 진실은 자신이 이오카스테와 라이너스의 아들이었으며, 테베로 오는 도중 사소한 다툼 끝에 죽였던 한 노인이 실은 자기의 친부인 라이너스 왕이었다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자기 눈을 찌른 후에 테베를 떠난다.
 
▲운명에 맞선 어리석음을 칭송함
 
 그 옛날에는 고결한 신분들이 운명에 맞서다 결국 굴복하고 마는 것을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꼈다고 한다.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오는 비극론이다. 왕처럼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자가 운명에 맞서다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 것을 보면서 연민을 느끼는 한편 공포도 같이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카타르시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연극 오이디푸스. 샘컴퍼니 제공

소포클레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살았던 시대에는 그랬다 치고 2019년 대한민국에서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희곡을 골랐을까. 나는 극을 보는 내내 연출이, 연출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아마 황정민의 연기가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고, 공을 들인 무대 세트에서 배우들도 그렇게 나쁘지 않은 연기를 선보여서 그랬을 수도 있다.

 연출의 변이 적혀 있는 팸플릿을 보고 싶었지만 팸플릿은 구하지 못했다. 애초에 팸플릿이 없다고 했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혼자 생각을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다. 오이디푸스는 매우 도덕적인 인간이다. 백성들을 위해 어떤 일이든지 하려고 한다.

그것이 설령 자기 목을 죄어오는 일이라도. 혹시 이것이었을까? 혼탁한 정치판에 일갈을 날리고 싶었을까?(그런데 정치인들은 이런 연극 안 볼 것 같은데)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마지막에 나왔다. 스스로 두 눈을 찌르고 장님이 된 오이디푸스가 지팡이를 짚고 눈보라가 날리는 길을 걸어가는 장면이었다. 청년 오이디푸스는 친부살해와 근친상간에 대한 신탁을 피하고자 이웃 나라로 갔다. 키워준 부모를 친부모로 알았기 때문이다.

이오카스테는 자기가 낳은 아들에 대한 신탁을 듣고 어린 오이디푸스를 버렸다.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이 있을까 모르겠는데, 어쨌든 연극 ‘오이디푸스’에 나오는 인물들은 그 운명에 맞서려고 했다. 물론 인간의 발버둥은 하잘 것 없는 것으로 밝혀지고 그들의 운명은 애초에 정해진 대로 종말 지어졌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노력이 한 치 앞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리석음보다 낫다고 느꼈다.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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