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고산리 융기문토기의 석 줄 덧띠 무늬

▲ <사진112> 고산리 유적 출토 융기문토기. 높이 27cm. 국립제주박물관. 보는 바와 같이 우리 신석기 그릇은 밑굽이 세모형이 아니라 이렇게 평형한 그릇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토기가 중요한 까닭은 한국미술의 시원이자 기원이기 때문이다. <사진113> 대전선사박물관, ‘처음 만난 토기, 제주 고산리 유적’ 전시 포스터(2018년 11월 30일-2019년 2월 28일).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서울 강동구 암사동에서 빗살무늬토기가 나온 지 벌써 94년째 되어간다. 그 오랫동안 우리는 빗살무늬의 뜻을 풀지 못했다. 8000년 신석기인의 세계관을 ‘기하학적 추상무늬’라 하고 ‘생선뼈무늬’라 했다. 본보는 수 차례에 걸친 기획을 통해 세계 신석기 그릇 문화사 속에서 한반도 신석기 빗살무늬의 비밀을 풀어 보고자 한다. 한반도 빗살무늬의 비밀을 푸는 일은 한국·중국·일본·베트남 신석기인의 세계관에 한 발짝 다가가는 일이고, 그와 더불어 세계 신석기인의 세계관을 그리는 일이기도 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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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만 년 전 고산리 신석기 마을
 
 제주도 북제주군 현경면 고산1리 자구내 마을 한 장밭 고산리 유적은 우리나라 신석기 유적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기원전 1만 년∼8000년 전)로 알려져 있다. 제주 고산리 유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내력이 있다. 1987년 5월, 고산리 주민 좌정인 씨는 흙이 필요해 한장밭에서 밭을 파다 이상한 둘 두 개를 발견한다. 한눈에 봐도 예사롭지 않은 돌이었다. 좌정인 씨는 이 둘 두 개를 마을로 가져와 대학생 윤덕중에게 보여준다. 윤덕중은 제주대학교 사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윤덕중이 봐도 그 돌은 사람의 손길이 닿아 있는 것이 분명했다. 곧바로 이청규(현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에게 알린다. 이 교수가 보니 두 돌 가운데 하나는 찌르개이고, 하나는 긁개처럼 보였다. 이렇게 하여 고산리 유적은 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사진114-115> 제주 고산리 유적에서 나온 긁개와 창끝 석기(첨두기) 찌르개. 위쪽이 긁개(scraper)이고 아래쪽이 찌르개(point)다. 긁개는 한쪽 또는 양쪽 날을 써서 나무나 가죽을 손질할 때 쓰고, 찌르개는 짐승이나 물고기를 찔러 잡을 때 썼다. 동그라미 속 찌르개가 고산리 자구내 마을 좌정인 씨가 발견한 석기다. 아래쪽에 슴베를 따로 내 나무 막대기에 꽂아 묶어 썼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 고산리
 
 <사진114>에서 아래쪽 석기 찌르개를 보면, 자구내 마을 좌정인 씨가 발견한 찌르개(동그라미 안)와 달리 그 오른쪽 찌르개는 슴베가 달려 있지 않다. 또 자세히 보면 슴베 달린 찌르개는 정교하게 돌에 갈아 다듬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에 견주어 오른쪽 찌르개(②)와 그 위 긁개(①)는 단단한 돌로 두들기거나 눌러 떼서 날을 날카롭게 했다. 돌 도구를 만들 때 이렇게 눌러 떼서 만드는 방법을 ‘눌러떼기’ 기법이라 한다. 이러한 가공 기술은 후기 구석기 때 널리 유행했다. 그래서 제주도 고산리 유적을 후기 구석기에서 초기 신석기 유적으로 보고, 그 시기를 기원전 1만 년에서 8000년으로 잡고 있다. 우리나라 신석기 유적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적인 셈이다.

<사진116> 고산리 바닷가 참호에서 융기문토기(<사진112>)가 나왔다. 동그라미 안을 보면 융기문토기 조각을 볼 수 있다. <사진117>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대학원생 강창화(현 한국신석기학회장) 씨가 참호를 살펴보고 있다.
 
대학원생 강창화, 1만 2000년 전 그릇을 찾아내다!
 
 1987년 좌정인 씨가 고산리 유적을 발견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발굴조사를 할 기관을 정해야 하고, 발굴 조사비가 내려와야 한다.

 1988년 1월, 당시 영남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대학원생 강창화 씨가 고산리 소식을 듣고 이곳을 찾았다. 한겨울이라 바닷바람이 여간 시린 게 아니었다. 그는 직접 조사를 해 보고 싶어 저 멀리 경상북도 경산에서 제주까지 달려왔다. 그는 맑은 눈으로 고산리 일대를 샅샅이 살폈다. 그러다 제주 국토방위군이 파 놓은 참호에 다달았다. 뭔가 느낌이 왔다. 그는 참호에 들어가 마치 구덩이를 스캔하듯 훑으며 차근차근 살폈다. 그렇게 한참 참호를 살펴보는데, 뭔가 눈에 들어왔다. 가만가만 조심히 흙을 걷어내니 분명히 토기 조각이었다. 그의 손은 떨렸다. 기원전 1만 년 전, 지금으로부터 1만 2천 년 전, 우리나라 그릇 역사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그릇을 대학원생 강창화가 찾아낸 것이다. 이렇게 되자 발굴조사를 더는 미룰 수 없었다. 하지만 조사는 그로부터 3년 뒤인 1991년에 이르러서야 이루어졌다.

<사진118> 1988년 강창화 씨가 찾은 제주 고산리 융기문토기 조각. <사진119>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 나온 덧띠무늬토기 조각. 구름 띠 위 짧은 빗금은 수분(물기)을 표현한 것이다. <사진120> 경기도 연천에서 나온 빗살무늬토기 조각. 이 조각은 아가리 쪽에 ‘하늘 속’ 물(水)을 새겼다.
 
토기가 세상에 나온 지 벌써 22년째인데도
 
 <사진118> 고산리 덧띠(융기) 무늬와 <사진119> 부산 동삼동 덧띠 무늬를 보면 아주 닮아 있다. 고고학자들은 이렇게 비슷한 무늬가 나오면 두 지역의 영향 관계부터 따진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것을 밝혀내지 못했다. 부산 동삼동 유적은 최대 기원전 6000년까지 내려잡을 수 있고, 제주 고산리 유적은 기원전 1만 년까지 내려간다. 그렇다면 굳이 영향 관계를 따지지 않더라도 제주 고산리에서 부산 동삼동으로 이러한 무늬가 흘러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토기를 놓고 영향 관계부터 따지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경우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이 무늬가 무엇인지, 무엇을 ‘구상’으로 한 것인지 먼저 밝혀야 한다. 이 토기가 세상에 나온 지 올해로 22년째 되어 간다. 그런데도 우리 고고학계와 미술사학계는 이 덧띠 무늬 세 가닥 가운데 어느 한 가닥도 아직 밝혀내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사진121> 아슐리안 주먹도끼. 프랑스 성 아슐(St. Acheul)에서 나왔다 해서 아슐리안 주먹도끼라 한다. <사진122> 전곡리 주먹도끼. 경기도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유적에서 나옴. 높이 15.5cm. 1978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한 주먹도끼다. 전곡리 주먹도끼는 아슐리안 주먹도끼에 견주어 투박한데, 그 까닭은 돌의 성질에서 비롯한다. 전곡리 주먹도끼는 주로 자갈돌을 차돌로 내리쳐 깨뜨려 만들었다. 이 돌은 아주 단단하기 때문에 눌러떼기를 할 수 없다.  서울대학교박물관.
 
한국미술의 시원이자 기원
 
 한국미술사의 첫머리는 보통 평양 상원군 흑우리 검은모루 동굴에서 나온 찌르개(뾰족끝석기)와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에서 나온 주먹도끼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이 두 석기는 오늘날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미술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두 석기를 넘어서 한국미술사의 시작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어떤 것이 있을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진112> 고산리 유적 출토 융기문토기(덧띠무늬토기)를 들 수 있고, 이 토기야말로 우리 한국미술의 시원이고 기원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이 토기의 무늬를 해석한다는 것은 한국미술의 시원과 기원을 밝혀내는 일이기도 하다. ‘빗살무늬토기의 비밀’ 연재글을 읽은 독자라면 이 무늬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진112> 그릇 무늬에서 가장 위 한 가닥은 하늘(天)이고, 그 아래 두 가닥은 구름(雲)이다.
김찬곤<광주대학교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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