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일 광주국제교류센터서 추모식
미국 장례식 후 유해 광주 안장 추진

▲ 일생 자유로운 영혼을 꿈꿨던 서유진 선생의 생전 환한 모습.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서유진을 추모하는 사람들> 제공
일생 동남아 각국을 돌며 광주민중항쟁정신을 전파해온 ‘5·18 전도사’ 서유진 선생이 16일 미국 볼티모어 자택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8세.

고인을 추모하는 광주지역 인사들로 구성된 ‘서유진 선생을 추모하는 사람들’은 오는 24일(금) 저녁 7시 광주 국제교류센터에서 추모행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 현지에서의 장례절차가 끝나면 사전에 유가족과 협의한대로 유해를 광주로 모셔와 안장하기 위한 절차도 진행한다.

고 서유진 선생의 유가족으로는 미망인(유남점), 아들(데일 서), 딸 (엘리원 서)이 있다. (사망시간 2019년 5월16일 미국 동부시간 오전 8시, 한국시간 오후 9시)

고 서유진 선생은 1998년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진 10년 간 ‘5·18의 아시아 전도사’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후로도 동남아에 머물며 각 나라의 민중과 부대끼는 삶을 살았다.

고인은 전북 완주 삼례 태생으로 북중-전주고를 졸업하고 한국외대에 진학한 이력으로 광주와는 특별한 인연이 없었다.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던 1980년엔 미국에 있었다. 서 선생은 당시 미국에서 뉴스를 통해 광주의 참상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2년 뒤 1982년, 김대중이 미국으로 망명했을때 그곳에 유배(?)돼 있던 한완상·문동환 등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DJ와 인연을 맺었다.
동남아를 모토사이클로 누비던 고 서유진 선생. 광주드림 자료사진

▲전북 출신 그가 5·18에 매료된 이유

당시 서유진 선생을 비롯한 재미 민주화 인사들은 거의 매일 미 국무성 앞에서 시위하며 ‘광주 학살 책임자 처벌’을 외쳤다.

그리고 DJ가 귀국했던 1985년, 그리고 1992년 같이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3년 광주를 찾았고, 이때부터 ‘5·18의 아시아 전도사’ 활동이 본격화됐다.

‘5월 성역화를 위한 광주시민연대’와 인연을 맺은 뒤 93년 광주에서 ‘해외에서 본 5·18민중항쟁 국제 심포지엄’을 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80년 5월에 광주에 있었던 외국인들을 다시 불러들여서 그때 당시를 증언케 한 것이다.

이때 교류한 윤장현 전 광주시장 등의 권유로 ‘5·18의 세계화 후 역수입’ 전략을 수립했다. “5·18 광주라는 텍스트는 지역간 증오감이 워낙 커서 어차피 전국화되기 어렵다. 차라리 밖(아시아)으로 끌고간 뒤 역류시켜보자”는 구상이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 이같은 계획은 구체화됐고, 서유진 선생은 스리랑카·인도네시아·미얀마·캄보디아 등 동남아 각국으로 나가 5·18을 홍보했다. 노무현 정부땐 아시아인권위원회 스페셜 엔보이(특사) 자격으로 더 큰 임무를 수행했다.

서 선생은 생전 본보와 인터뷰에서 ‘왜 5·18에 매료됐는가?’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민중 봉기는 세계사적으로 여러 건 있었어요. 그럼에도 유독 광주에서 일어난 봉기는 유니크하죠. 전 시민(당시 80만 명)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잖아요. 오죽했으면 계엄군도 놀라서 (일단)물러나고 말았잖소. 광주 외곽이 계엄군에 포위대 고립된 10일을 봐요. 그 시간은 소위 법과 질서가 무너진 상태에요. 이러면 반드시 가게 침탈, 은행 탈취, 교도소 습격 등 공격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광주에선 이런 게 하나도 없었어요. 안에서는 주먹밥 나눠먹는 공동체가 형성되고, 젊은이들은 소총 몇자루로 무장하고 탱크와 헬리곱터로 무장한 정규군과 맞장뜬겁니다. 이런 사건은 전세계에 없어요.”
지난해 오월 어머니상 수상 때. <서유진을 추모하는 사람들> 제공

▲광주 타이틀 ‘정의도시’로 주장도

또 서유진 선생은 2011년부터 2년간 본보에 ‘아시안로드다이어리’를 연재한 바 있는데, 광주를 `City of Human Rights’(인권도시) 대신 `City of Justice’(정의도시)로 명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당시 논거는 “베트남은 공산당 일당 체제이고, 미얀마(버마)는 철옹성 같은 군부가 독재하고 있다. 그들에게 ‘City of Human Rights’(인권도시) 광주로 초대하겠다는 초청장을 발송할 때 아주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80년 5월을 기점으로 태동한 광주의 ‘인권도시’ 라는 이미지가 이질 문화권에도 편안하게 다가갈 것인가를 고뇌할 때가 됐다”고 주장했다.

한편 아시아인권위원회(AHRC) 바실 페르난도 위원장은 추도사에서 “서유진 선생과 같은 분들이 있었기에 광주가 민주주의로의 길을 열어 세계적인 인권도시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면서 “서유진 선생은 암울했던 시절에 민주주의와 인권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분으로 보기 드문 유산을 남겼다. 그의 삶이 수많은 사람들이 그 횃불을 앞으로도 영원히 이어가도록 영감을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기원했다.

서 선생은 스스로를 정글을 누비고 다닌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고 했다. 그는 여행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다양한 세상 만물을 획일적인 시선으로 보고, 또 획일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여행을 통해서 실감할 수 있다”고.

또 “여행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세계 각지에서 온 수많은 여행객과 자주 어울리게 된다. 자연스럽게 우리와 다른 이질 문화권 사람들을 만나며 그들로부터 얻게 되는 지식이나 그들이 자기 나라에 있을 때 일상의 이야기들을 통해 책이나 잡지를 읽는 것과 달리 훨씬 생생하고 정제되지 않은, 그야말로 날로 접하게 되는 많은 첩보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첩보들이 믿을 만한 정보가 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 분석하고 검증을 거쳐야 하는데 나는 그 과정를 즐긴다”고 했다.

일생 자유로운 영혼이고자 했던 그가 진정한 자유인이 됐다. 영면을 기원한다.
<서유진을 추모하는 사람들> 제공

▲고인 유해 광주 안장 추진

고인의 장례식은 5월 20일(월) 미국 현지시간으로 저녁 7시 볼티모어에 위치한 한사랑교회(김병은 목사)에서 유가족과 지인이 참석한 가운데, 미주워싱턴지역 호남향우회 주관으로 거행된다.

한편 광주에선 5·18 광주정신 세계화를 위해 평생 헌신한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모인 ‘서유진 선생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오는 24일(금) 저녁 7시, 광주 국제교류센터에서 추모행사를 갖는다.

이어 미국 현지에서의 장례절차가 끝나면 사전에 유가족과 협의한 대로 유해를 광주로 모셔와 안장하기 위해 관련 절차를 진행할 계획임도 밝혔다.
채정희 기자 goodi@gjdre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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