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아버지, 고통 받는 딸 가족서사
웃음 유발 속 던져진 “아버지란 존재는?”

▲ 연극 ‘경숙이 경숙 아버지’ 동산아트홀 제공
 5월4일부터 26일까지 동산아트홀에서는 연극 ‘경숙이 경숙 아버지’가 공연됐다. ‘경숙이 경숙 아버지’는 박근형 작, 연출로 2006년에 초연된 작품이다. 박근형은 한국 연극계에서는 꽤나 이름이 알려진 사람으로, 모 방송국의 ‘꽃보다 할배’라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배우와는 동명이인이다.

 ‘경숙이 경숙 아버지’는 전부터 보고 싶었던 연극 중 하나였는데 기회가 없어서 관극을 하지 못한 채 2019년이 되어 버렸다. 서울에서 성공한 로맨틱 코미디만 가져와서 공연한다는 인상이 짙었던 동산아트홀에서 모처럼 제대로 된 연극이 올라간다는 소식을 접하니 조금 설레었다. 하지만 2006년에 초연되어 성공한 연극이라는 점을, 그 세월의 간극을 생각지 못한 채 연극을 보러 갔다.

 ‘경숙이 경숙 아버지’는 제목 그대로 경숙이라는 딸과 그 아버지에 관한 얘기이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가족 서사이다. 연극의 첫 장면에서 경숙이는 아이를 낳는다. 난산의 고통 속에서 경숙이는 아부지를 외쳐 부른다. 의사는 경숙의 가족에게 산모도 아이도 위험하다고 말한다. 경숙이는 계속 숨이 넘어간다. 이 위급하고 긴박한 순간에 연극은 이 부분을 웃음으로 끌고 간다. 아이는 기적적으로 태어나고 경숙이도 무사한데, 그 과정이 몹시 재미있게 연출되어 있다. 그리고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를 보며 가족은 일제히 소리친다. “경숙이 아부지?”
연극 ‘경숙이 경숙 아버지’ 동산아트홀 제공
 
▲전형적으로 가부장적인 남자
 
 경숙이 아버지는 전형적인 한국 남자, 혹은 가부장적 인물이다. 전형적인 한국 남자라고 했지만 이 연극의 시대적 배경에서 한 말이다. 이 연극은 일제 말부터 한국전쟁을 거치고 그 후 어느 시점까지가 시간적 배경이다. 공간은 경상도 지역이다. 그래서 배우들은 모두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한다. 이런 시간적 공간적 배경에서 가부장적이고 전형적인 한국 남자를 연상하면 경숙이 아버지의 일부를 떠올릴 수 있다.

 전쟁이 터지자 경숙이 아버지는 아내와 딸을 버리고 혼자만 피난을 떠난다. 이 부분에서 관객이 보인 웃음의 의미는 경숙이 아버지가 일반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아버지와 상반되는 이미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 어긋남의 차이에서 생성된 것이라 보인다. 가부장적인데 가족에 대한 책임감 따위는 없는 인물, 그것이 경숙이 아버지이고 그의 철없는 행각은 그의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지속된다. ‘가부장(家父長)’의 사전적 의미는 ‘가족을 대표하는 남자 어른’이고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것 중에 하나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다. 그런데 경숙이 아버지는 몹시 유아적이어서 애초에 한 가족을 보호하거나 책임질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한 가정의 가부장이 그런 상태면 그 틈새에서 고통 받는 것은 당연히 가족 구성원들이다. 그래서 경숙이와 경숙이 어머니는 가장이 부재한 집안에서 힘들게 삶을 영위한다. 그런데 이 연극은 딱히 그 부분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저 한 철딱서니 없는 가장이 벌이는 행각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을 조금은 담담하게 그러나 웃음을 유발하도록 연출된다.

 그러니 아마도 이 연극은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볼 것을 요구하는 작품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가 지고 있는 삶의 무게, 한 인간으로서 아버지의 욕망 같은 것 말이다. 경숙이 아버지는 계모와 아버지 아래에서 사춘기를 보냈고, 계모 몰래 아버지가 쥐어 준 외양간 열쇠(당시 경숙이 아버지의 아버지네 전 재산이 있는)를 가지고 도망을 쳤다. 아버지가 벗어준 낡은 군화를 신은 채 말이다.

 경숙이 아버지가 평생 애지중지 신고 다닌 이 신발의 이미지는 나중에 (거의 아비 없이 자란) 경숙이가 대학을 졸업할 때 홀연히 나타난 경숙이 아버지가 경숙이에게 선물로 주는 구두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만약 경숙이가 딸이 아니고 아들이었다면 혹시 경숙이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의 헌 군화를 자기 아들에게 물려주었을까? 경숙이는 처음에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선물인 구두를 부정하지만 결국엔 아버지를 부르며 운다.(이 부분은 거의 신파다.)
연극 ‘경숙이 경숙 아버지’ 동산아트홀 제공
  
▲천연덕스러운 연기…“배우들께 빚진”
 
 블랙 코미디로 느껴질 만큼 웃음과 웃음으로 연출된 연극 ‘경숙이 경숙 아버지’에서 가장 이해 안 되는 부분은 경숙이 아버지가 정신을 놓고 빠져든 술집 여자 희야가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리자 경숙이 어머니가 칼을 들고 찾아가서 희야와 대치하는 부분이다. 경숙이 어머니는 평생 가장 노릇을 못한 남편이지만 새 각시가 자기 남편을 무시하는 것을 참지 못하고 제발 다시 돌아오라고 사정한다. 희야는 그런 경숙이 어머니와 경숙이 아버지를 모두 무시하는데 이 갈등은 갑자기 나타난 신(예수)의 형상으로, 두 여자 모두 종교에 빠지면서 해결된다.

 연출가 박근형은 여기에 대해서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키나’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나온 연극적 기법이다. 해결이 어려운 극적 상황에서 마키나라는 지게차 모양의 장치를 이용하여 신을 등장시켜 단번에 해결을 보는 것이다. 이런 억지스러운 결말을 의미하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뻔뻔하게 쓰고 또 그것이 ‘데우스 엑스 마키나’라고 인정한 연출가는 경숙이 아버지를 연상시킨다. 2006년에는 이런 연출 기법과 연출가가 낭만적으로 보였을까?

 연극 ‘경숙이 경숙 아버지’는 많은 부분을 배우에게 빚지고 있다. 각본도 연출도 천연덕스럽지만 그런 연출과 각본에 맞게 천연덕스러운 연기로 무대를 꽉 채운 배우들의 열연이 없었다면 보기 힘든 연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페미니즘의 시각에서나 또 다른 의미로도 2019년에 관람하기는 비합리적 요소가 많은 연극인데 배우들이 연극을 살리고, 관객은 그에 호응했다. 관객이 보낸 웃음과 박수 대부분은 배우들의 연기에 대한 답이었다고 보는데 만약 다른 요소들이 있다면 그것은 좀 더 연구해 봐야 하는 문제이다.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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