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이상 지킨 목욕탕, 살아남은 희망
“싱겁지만 속은 편한 된장국 같은 작품”

▲ 목욕탕 부르스 공연장면. 희망문화협동조합 이사장 임준형 제공.
 비가 세차게 오는 6월의 어느 날에 극장 ‘통’을 찾았다. 극장은 ‘통(원래 극단 ‘청춘’의 전용극장)’이었지만 무대를 올리는 극단은 ‘크리에이티브드라마’였고,

‘희망문화협동조합’이라는 곳이 협력기관으로 되어 있었다. 김원민 창작 희곡이었고, 연출은 이행원, 기획은 ‘희망문화협동조합’ 이사장인 임준형이었다. 임준형은 총 네 명이 출연하는 연극에 배우로도 참여하고 있었다. 연극 주제가도 있었는데, 김상수라는 가수가 작사, 작곡했다고 돼 있었다. 리플릿을 읽고 있으니 아주 나이 많은 집사들의 정식 모임에 초대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박하지만 격식과 예의를 갖춘 연회가 이제 곧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가운데 무대는 이 연극의 중심인 ‘희망목욕탕’의 탈의실이었다. 가운데에는 목욕탕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나무 평상이 놓여 있고, 그 뒤로 사물함이 몇 개 있었다. 평상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역시 목욕탕에 가면 흔히 볼 수 있는 드라이어나 빗 같은 물건으로 채워진 공간이 있는데 특이하게도 큰 트로피가 있었다.

트로피 이외에도 한 가지 더 시선을 끈 소도구는 어느 여배우의 젊은 시절 브로마이드였다. 뒤쪽 벽에 붙은 탤런트 사미자의 한창 때 사진을 보면서 영화 ‘쇼생크 탈출’에 쓰였던 배우 리타 헤이워드의 사진을 떠올렸다. 리타 헤이워드를 모른다고 영화를 이해 못하지는 않는다. 사미자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연극 ‘목욕탕 블루스’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종의 공감의 영역이었다. 사미자를 단번에 알아보는 관객들은 연극을 좀 더 편하게 혹은 쉽게 관람할 수 있는 회선을 하자 더 획득한 셈이랄까.

목욕탕 부르스 공연장면. 희망문화협동조합 이사장 임준형 제공
 
 ▲세신사로 삶의 희망 붙잡은 청년
 
 연극의 서사구조는 복잡하지 않다. 낡고 오래된 목욕탕을 30년 넘게 지켜온 사내가 있다. 이젠 손님도 별로 없지만 목욕탕을 접지 못한 채 그냥 살고 있다.

표면적인 이유는 힘든 날을 함께 버텨왔던 아내가 먼저 죽는 바람에 아내에 대한 기억 때문이라고 하지만 어쨌든 ‘희망’이라는 이름을 가진 목욕탕을 떠나지 못하고 습관처럼 살고 있다. 사내는 한 때 전국을 제패했던 세신사였는데, 러시아 유학파 출신이다. 트로피는 그 때의 성과물이다.

가수가 되고 싶지만 그냥 음악 카페나 하면서 꿈을 이루지도 접지도 못한 채 그냥 살고 있는 동네 후배 하나가 뻔질나게 목욕탕을 드나든다. 이 목욕탕의 성실한 단골손님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건물주 최씨다. 그런데 이 최씨가 죽고 그 아들이 목욕탕 자리에 재즈 바를 세우려고 한다. 이 와중에 사내는 병에 걸린다.

 목욕탕 주인과, 음악 카페 주인과, 건물주 아들, 이렇게 세 명의 나이 든 남자 틈에 한 명의 젊은이가 끼어든다. 세신사가 되겠다고 찾아오는 정우다. 정우는 대학을 졸업한 후 무수한 곳에 입사원서를 내지만 모두 떨어진다. 절망에 절망을 거듭하던 정우는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하고 죽기 전에 몸을 정갈히 하고자 목욕탕을 찾는다. 찾는 김에 세신사의 도움을 받아 때도 밀기로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살 희망을 느낀다. 누군가의 도움으로 때를 밀면서 말이다. 목욕탕 주인을 비롯한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우는 세신사가 되려는 뜻을 굽히지 않는다. 정우는 쇠락해가는 목욕탕을 일으켜 세우고자 열심히 일한다.

희망문화협동조합 이사장 임준형.
 
 이 연극의 결말은 해피엔딩이다. 목욕탕을 밀어버리고 재즈 바를 세우려던 건물주 아들의 계획이 실패해서 목욕탕이 살아남기 때문이다.

목욕탕 주인은 병에 걸리지만 젊은 세신사 정우가 든든하게 버티기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음악카페 주인은 낡아서 이제 용도 폐기해야 할 줄 알았던 가수의 꿈을 갑자기 이루게 된다. 긴박한 상황이나 갈등구조는 없고, 있어도 아주 쉽게 해소된다. 마치 소화기관 약한 이들이 먹는 부드러운 흰죽이나 싱겁지만 속은 편한 된장국 같은 작품이다. 그 점이 좋았다. 과하지 않았다는 점. 예의와 격식을 차린답시고 힘을 잔뜩 준 연극이 아니었다. 아주 편하고 능숙하게 이야기를 풀어갔고, 관객들은 몰입했다.
 
 ▲마지막 부분 ‘꼰대’같은 대사 ‘흠’
 
 한 가지 흠은 있었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연극 속에서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문제를 길게 대사로 친 부분이 있었다. 힘든 일은 하기 싫어하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 대해 따끔하게 충고하는 대사였는데, 설마 이 연극은 이 얘기를 하려고 이렇게나 길게 극을 끌어왔나 싶어서 당황스러웠다.

 
그 대사를 듣는 순간의 기분을 표현하자면 딱 이랬다. ‘꼰대들의 합창’ 나중에 극단 쪽에 문의하니 그 날 하루 배우가 즉흥적으로 친 대사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나는 바로 그 하루에 가서 하필 그 즉흥 대사를 듣게 된 것이다.

 현명하게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오래된 목욕탕을 지키는 주인 역으로 나온 배우는 노련한 베테랑 연기자라는 느낌을 주었고,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제 옷을 입은 것처럼 캐릭터를 잘 살렸다. 그런데 한 순간 기분에 극의 흐름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는 대사를 해 버린 것이다. 세신사 일을 하는 정우가 기특해서 칭찬하려고 한 대사였다고 하는데 칭찬보다는 다른 젊은이들에 대한 질타의 느낌이 강했다. 지혜롭고 믿음직한 어른에서 잔소리 대마왕 꼰대로 바로 추락했다. 아쉬운 부분이다.

 ‘목욕탕 블루스’라는 연극은 세대 간 격차도 무리 없이 잘 표현해내었고, 전반적으로 즐거운 무대를 보여주었다. 후반부에 약간의 신파분위기가 미약하게나마 감지되었고, 배우의 즉흥 대사가 연극 전체의 격과 톤을 떨어뜨렸지만 무난한 연극이었다. 신들이 인간에게 선물한 판도라의 상자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 희망이다. ‘희망문화협동조합’의 무궁한 발전을 희망한다.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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