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이라는 것의 준엄성”

▲ 최서해 초상화.<그림=강현화>
▲요절 작가의 특별했던 삶
 
 지난 회에 1920년대 ‘신경향파 대표작가’ 최서해에 대하여 다루긴 했으되 만족스럽지 않아 아쉬움이 남았었다. 특히 남달랐던 그의 삶과 그것이 작품 활동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말하지 못한 것 같아, 그 부분을 보충하면서 다시 한 번 최서해에 대하여 말하기로 한다.

 최서해(본명은 최학송)는 1901년 함경북도 성진군 임명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소학교를 중퇴한 후 18세 되던 해, 고향을 떠나 간도로 들어간 서해는 목도꾼, 벌목꾼, 물장수, 두부장수, 머슴살이 등등으로 전전했으며 굶주림과 병으로 구차한 밑바닥 삶을 살았다.

 1923년, 23세 되던 해 유랑생활을 마치고 간도에서 귀국한 서해는 회령역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서울의 춘원, 파인 김동환 등과 편지를 교환하다가 이듬해 무작정 상경해 춘원을 방문해 식객노릇을 한다. 그러다가 춘원의 소개로 경기도 양주군 봉선사에 들어가 승려 생활을 한다. 서해는 이곳에서 일문(日文)으로 된 서구문학을 공부하면서 <탈출기> 등의 작품을 쓴다.

 거기서 얼마를 못 있고 “중놈들이 아니꼬와서 메다꼰고” 나온 그는 다시 춘원의 소개로 춘해 방인근의 집에 기거하면서 방인근이 주재하던 잡지 ‘조선문단’ 편집일을 돕게 된다. 그때는 방인근이 ‘조선문단’ 10여 호 발간에 이미 파산의 궁경에 직면했을 때이니만큼 서해의 생활이 여전히 빈궁(貧窮)의 연속이었다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래도 그는 여기서 ‘고국’(1924) ‘탈출기’(1925) ‘기아와 살육’(1925) 등을 발표하는 사이에 때마침 열병처럼 일어나던 프로문학운동의 물결 속에서 대번에 시대의 총아가 되었다.

 1925년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가 결성되자 서해는 이 단체에 맹원으로 가입하는 한편, 현대평론지 문예담당 기자, 중외일보사 기자, 잡지 장한(서울 기생들의 조합지적 성격을 띤 잡지) 기자 등을 역임하면서 생계를 위한 직장을 전전한다. 생계를 위해 잡지와 신문기자를 전전하는 일은 그가 죽기 직전까지도 계속되며, 그가 마지막 몸담았던 곳은 학예면을 담당하던 ‘매일신보’였다.

 서해는 문단에 나선 지 10년도 못되는 1932년 7월에 대수술을 받은 후 경과가 좋지 못해 고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서해가 죽은 지 2주년이 되던 날 문단에서는 미아리 공동묘지의 그의 무덤에 묘비를 세워주고 고인을 추모했다.

 서해가 세상을 떠난 지 3주년이 되던 1935년 7월에 그의 친우인 박상엽은 서해의 소년시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외아들이었다. 누님이 하나 있었는데 출가한 뒤 죽었다는 것이다. 날 때부터 서해는 축복된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했든 모양이다. 견묘(犬苗)의 사이와 같은 아버지의 미움과 어머니의 사랑 밑에서 자라났으니 어릴 때부터 음침한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자란 것도 상상할 수 있다. 그의 단편소설 <박돌의 죽엄>을 읽으면 돈밖에 모르고 인정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한의(漢醫)가 나온다. 서해의 아버지도 한방의이었다는 소리를 들었다.

 서해가 몰인정한 이 한의의 심리를 폭로하기 위하여 <박돌의 죽엄>을 쓴 동기는 이 소년시절에 받았던 그의 아버지의 인상에 다소 원인되지 않았을는지……(중략)…하여간 서해는 간도에서 보통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생을 한 모양이다.―어떤 때는 상투잡이가 되어 나뭇바리 장수도 하여보고, 노동판에서 십장 노릇도 하여보고, ○○단에 따라다니느라고 총을 메고 눈 싸힌 어름 벌판도 헤메이다가 총에 맞아 죽은 동지의 시체를 혼자서 어름 벌판에서 밤을 새어가며 지켜보기 등등―이러한 몇 가지 사례를 보드라도 서해는 한 개의 ‘소설적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문단’ 제4권 제4호 ‘서해와 그의 극적 생활’에서)
 
 여기서 ‘소설적 인간’이란 소설 같은 삶을 몸소 살아온 사람이라는 뜻과 함께, 따라서 풍부한 소설적 소재를 자기 내부로부터 끌어올 수 있는 작가라는 뜻도 갖고 있을 것이다. ‘창조’ ‘폐허’ ‘백조’파 작가들 대부분이 “고이고이 자라난 서생 출신에 지나지 못하였고”(김동인의 표현) 문학적 소재를 때때로 요정의 술잔에서 얻은 반면, 서해는 쓰라린 가난의 체험 속에서 그것을 얻었다.
 
 이에 더해 비평가 김우종은 “서해의 문학은, 기존의 문학과 달리 유독 빈궁을 그렸다는 의미에서 가치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절실한 문제성의 토대 위에서 작품이 출발했기 때문에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서해야말로 생활이라는 것의 준엄성을 누구보다도 명백히 실감하고 있었기에 “그의 문학은 절망과 공포와 분노 등으로 충만한 빈궁의 문학이요, 그 빈궁의 비애 속에서 해방되려는 저항의 문학이었다”는 것이다(김우종, 1992).
말년의 서해.
 
▲신구소설을 독파한 노력파
 
 서해는 생활이라는 것의 준엄성을 실감한 바탕에서 작품을 썼고 그 절실함이 독자에게 감동으로 전달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서해의 붓은 어떠했을까? ‘작품을 쓰는 기술’이라는 좁은 의미에서의 작품성을 따질 때, 그의 붓은 결코 둔탁하지 않았다. 서해의 막역한 친구이며, 당시 신문기자였던 박상엽은 이렇게 말했다.
 
 “어린 소년 서해는 문학에 대한 흥미를 가지게 되어, 그는 장거리에 나아가서 신소설 구소설 할 것 없이 하나도 빼어놓지 아니하고 사다가 밤을 새워가며 읽었다는 것이다. 서해는 소설을 쓰려고 하는 사람은 적어도 조선 말의 특유성과 조선사람의 정조를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는 케케묵은 신구소설을 독파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박상엽, ‘서해의 극적 생애’에서)
 
 당시 조선 문단은 춘원, 김동인, 상섭, 빙허 등 중산층 일본(및 해외) 유학생 출신 엘리트들의 독무대였다. 보통학교를 중퇴한 게 전부인 서해가 ‘조선말의 특유성과 조선사람의 정조를 알기 위해’ ‘케케묵은 신구소설을 독파’하며 기울인 노력이 어떠했을지는 감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서해의 소설을 읽어본 필자의 감상은 (기술적인 측면만 보더라도) △도입부에서 작품 전체의 배경 묘사가 치밀하고 △사건과 사건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며 △인물의 대화 처리에서 모호함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곧 서해의 문장은 결코 미숙하지 않고 오히려 원숙한 경지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무한한 노력을 통해 다듬은 붓으로 서해는 1920년대의 모순된 사회 구조가 낳은 간도 유·이민들이 겪는 물질적·정신적 고통을 집요하게 반복·묘사했다. 특히 서해의 초기 소설은 간도를 배경으로 한 것이 국내를 배경으로 한 것보다 작품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 많은 비평가들이 그의 소설세계의 본령을 여기서 찾는다. ‘토혈’ ‘고국’ ‘탈출기’ ‘박돌의 죽음’ ‘기아와 살육’ ‘이역원혼’ ‘홍염’ 등이 이에 속하는데, 간도생활 경험을 그려낸 1925년 작 <탈출기>는 그의 처참한 빈궁생활의 보고로서는 대표적인 기록이었다. 그는 거기서 다음과 같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빈곤은 날로 심하였다. 이틀 사흘 굶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이틀이나 굶고 일자리를 찾다가 집으로 들어가 보니 부엌 앞에서 아내가 (아내는 이때에 아이를 배어서 배가 남산만하였다) 무엇을 먹다가 깜짝 놀란다. 그리고 손에 쥐었던 것을 얼른 아궁이에 집어넣는다. 이때 불쾌한 감정이 내 가슴에 떠올랐다. ‘……무얼 먹을까? 어디서 무엇을 얻었을까? 무엇이길래 어머니와 나 몰래 먹누?…….’ (중략) 싸늘하게 식은 재를 막대기에 뒤져내니 벌건 것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것을 집었다. 그것은 귤 껍질이다. 거기는 베먹은 잇자국이 났다. 귤 껍질을 쥔 나의 손은 떨리고 잇자국을 보는 내 눈에는 눈물이 괴었다.”
(‘탈출기’에서)
 
 서해는 이 작품을 비롯한 많은 작품에서 간도로 이주한 조선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선명하게 그려냈다. 또한 첫 작품 ‘고국’에서는 조선 농민들이 이주한 만주·간도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일제강점기 조선 민중의 간도 유·이민에 대한 문학적 형상화는 서해의 작품을 벗어나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곳에 사는 사람은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 사람이 많다. 거개가 생활 곤란으로 와 있고 혹은 남의 돈 지고 도망한 자, 남의 계집 빼가지고 온 자, 순사 다니다가 횡령한 자, 노름질하다가 쫓긴 자, 살인한 자, 의병 다니던 자, 별별 흉한 것들이 모여서 군데군데 부락을 이루고 사냥도 하며 목축을 하며 농사도 하며 불한당질도 한다. 그런 까닭에 윤리도 도덕도 교육도 없다. 힘센 자가 으뜸이요 장수며 패왕이다. 중국 관청이 있으나 소위 경찰부장이 아편을 먹으면서 아편 장수를 잡아다 때린다.”
(‘고국’에서)
서해와 그의 아내.
 
▲서해에 대한 비판들
 
 그런데 간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던 서해의 ‘빈궁의 문학’ ‘저항의 문학’은 1928~29년부터 방향을 튼다.

 곧 더 이상 만주체험이나 운동가를 다루지 않고, 그 대신 소시민이나 도시빈민의 가난한 일상을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이 무렵 서해는 카프에서 탈퇴하고(1929년), 경영난을 겪던 중외일보사를 퇴사하며(2년간 일하면서 받은 월급은 한 달 치뿐이었다), 매일신보의 학예부장이 된다.

 이 시기의 서해를 회고하면서 박상엽은 “서해는 현대평론사를 비롯하여 너저분한 잡지에까지 손을 대었다. 하다못해 기생들의 돈을 긁어 하던 잡지에까지 손을 대었다. 여기서 생기는 약간의 수입으로 겨우 겨우 입에 풀칠을 하여 갔다”고 하면서 “(그러나) 나는 만년에 있어서의 서해의 속화한 생활(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을 비난하기 전에 뜨거운 눈물로 동정하고 싶은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것은 물론 서해를 진심으로 추모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이야기이며, 그 안에 많은 진실이 담겨있을 것이다. 필자도 비슷한 마음이다.

 서해에 대한 비난은 그가 빈궁문학·저항문학을 하고 카프에 가담해 재무담당까지 하다가 어느덧 소시민의 고뇌를 말하고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학예부장을 맡는 데까지 나아간 점에 모아진다.

 하지만 이 점은 시각을 달리 해서 봐야 한다. 서해는 극도의 빈곤 속에서도 태생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문단 내 교우관계도 협소하지 않았다. 민족주의 진영 작가 김동인의 재혼 때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가 들러리를 서 주었고, 요절한 낭만주의자 나도향의 추모비를 세우는 데 앞장서기도 했다. 또한 그의 문학적 스승은 춘원이었다. 1927년에는 범문단 조직으로발족한 조선문예가협회에서 간사직을 맡기도 했다. 서해와 카프의 관계를 절대적인 것, 떼려야 뗄 수 없는 종류의 것으로 간주해서는 곤란하다. 더욱이 그를 사회주의자로 보기는 망설여진다.
곽근이 편집한 최서해 전집(1986).

 한편 서해에 대한 비판은, 그의 문학이 프로문학이지만 ‘전망의 부재’와 ‘사상의 빈곤’이라는 한계를 갖는다는 점에 모아진다. ‘전망의 부재’란 서해의 작품에서 “주인공들이 감당할 수 없는 외부 압력에 짓눌려 살인·방화·폭행·호규 등 충동적 발작적·허무적·행위로 폭발, 자기 파괴의 몸부림으로 끝장내고 마는 것”을 말한다(김윤식·정호웅, 2000). 또 ‘사상의 빈곤’이란 “작가가 현실적 비애의 궁극적인 원인을 해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주인공으로 하여금 맹목적인 무의미한 반항으로 끝을 맺게 하고 있는 것”이라는 지적이다(김우종, 1992).

 이 비판은 문제의 핵심(서해의 약점)을 짚은 것이어서 가볍게 들을 수 없는 것이지만, 이 또한 다른 접근이 있을 수 있다.

 좌우를 막론하고 비평가들은 프로문학이라는 범주의 하위범주로 ‘경향문학’을 설정하고 그 대표적 작가로 서해를 들고 있다. 카프 진영 비평가 임화를 따라 프로문학운동의 단계를 설정하고, 그 ‘준비기’로 경향문학을 위치 짓는 것이다. 일종의 발전단계론인데, 그보다는 서해의 문학 나아가 경향문학의 독자적인 특성을 조금 더 강조하는 쪽으로도 과감한 비평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서해의 한계를 생각하면서도 서해의 가치를 새롭게 발견하기를 희망한다.
글=문수현/ 그림=강현화

 ※글쓴이 문수현은 전북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습니다. 현재 전북교육신문 기자로 활동 중입니다. 아울러 이 코너는 전북교육신문에도 함께 실립니다.
 
 ※그린이 강현화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지금은 시골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최서해전집上·下(곽근), 문학과지성사, 1987
 최서해 작품·자료집(곽근), 국학자료원, 1997
 한국현대소설사(김우종), 성문각(증보판), 1992
 한국소설사(김윤식·정호웅), 문학동네, 2000
 최서해(한수영), 소명출판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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