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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유진의 무대읽기]연극 ‘바냐 아저씨’
생애 첫 사랑의 단비 맞은 늙은 농부
허무한, 그리고 끈질긴 삶이란 화두
임유진
기사 게재일 : 2019-09-02 06:05:01
▲ 쩰레긴과 바냐와 교수.<광주배우협회 제공>

 8월21일부터 24일까지 궁동예술극장에서는 광주배우협회의 연극 ‘바냐 아저씨’가 올라갔다. ‘바냐 아저씨’는 러시아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안톤 체홉(1860~1904)의 희곡이다. 보통 안톤 체홉의 4대 희곡을 ‘갈매기’, ‘벚꽃 동산’, ‘세 자매’, 그리고 ‘바냐 아저씨’로 꼽는다. ‘바냐 아저씨’는 전 4막으로 구성되어 있고, 배경은 19세기 말 러시아의 시골이다.

 ‘바냐 아저씨’는 ‘바냐 삼촌’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우리식대로 정확히 번역하면 바냐 외삼촌이다.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인 소냐의 외삼촌이 바냐다. 바냐와 소냐는 시골에서 소처럼 일하며 번 돈을 거의 모두 도시에 있는 소냐의 아버지에게 보낸다. 소냐의 아버지는 교수다. 바냐와 소냐가 노동자 혹은 농민 계급이라고 할 때 교수인 소냐의 아버지는 인텔리 계층이라고 할 수 있다. 바냐는 시골에서는 나름 교육받은 축에 들지만 소냐의 어머니인 자기 누이가 죽자 소냐를 도와서 땅을 경작하고 거기에서 나오는 수입을 교수인 소냐의 아버지에게 보내며 나이를 먹었다. 바냐는 시골의 영지가 죽은 누이가 지참금으로 가져온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소냐의 땅이라고 생각하고 조카를 도와 땅을 지킨 것이다.

 그런데 소냐의 아버지가 은퇴를 하고 젊은 새 아내와 함께 시골로 온다. 연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교수의 새 아내는 몹시 아름다운 여인으로 나이는 스물일곱이다. 바냐는 매부의 새 아내 엘레나에게 빠진다. 엘레나는 교수와 나이 차가 많이 나지만 교수를 동경하고 사랑해서 결혼했기 때문에 이런 바냐의 마음이 버겁기만 하다. 여기에 또 한 명의 인텔리인 의사가 등장한다. 시골에서 나무를 키우며 숲을 가꾸면서 환자도 돌보는 의사는 바냐하고는 친구처럼 지냈다. 하지만 이 의사 역시 엘레나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진다. 바냐와 의사는 친구에서 연적으로 사이가 변한다. 그리고 소냐는 이 의사를 사랑한다.
 
▲농부, 매부의 새 아내를 사랑하다

 연극 ‘바냐 아저씨’는 이렇게 은퇴한 교수가 젊은 새 아내와 시골에 와서 머무르다가 다시 도시로 떠나는 동안의 시간을 담고 있다. 바냐와 소냐는 교수와 엘레나가 온 다음부터 전과 같은 생활을 하지 못하는데, 일찍 아침을 먹고 일하러 갔다가 점심을 먹은 후에 또 일하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쉬는 농부의 생활리듬을 잃어버린다. 그나마 소냐는 정신을 차리고 일을 하지만 엘레나에게 빠진 바냐는 게으르고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병든 교수를 위해 왕진을 온다는 핑계로 사실은 엘레나를 보러 자주 들락거리는 의사를 사모하는 소냐도 이제 게으른 생활에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광주배우협회의 ‘바냐 아저씨’는 공들인 흔적이 역력한 작품이었다. 궁동예술극장이 소극장이라, 4막이나 되고 대부분 대극장이나 소극장이라도 공간이 조금 넓은 곳에서 공연되는 체홉의 ‘바냐 아저씨’를 어떻게 담아낼지 내심 궁금했는데 작은 공간을 배우들의 정돈된 연기와 열정으로 가득 채움으로써 공간의 협소함이 주는 불만을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연출이 동선을 잘 짜고 배우들도 잘 해 냈다는 의미다.
의사와 엘레나.<광주배우협회 제공>

 연출가인 양승걸은 광주배우협회 소속은 아니고, 서울 대학로에서 활동하는 배우인데 이번에 특별히 연이 닿아 연출을 맡게 되었다고 했다. 4막이나 되는 작품을 잘 각색했고, 대사도 잘 다듬은 편이었다. 또 의상이나 소품, 무대 장치에도 세세하게 신경을 써서 19세기 말 러시아의 인물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환상을 무리 없이 재현했다.

 주인공 바냐 역은 광주의 중견배우인 노희설이 맡았고, 역시 중견배우이며 광주연극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는 극단 청춘의 대표 오설균이 교수 역을 맡았다. 엘레나 역은 정경아가, 소냐 역은 김은미, 의사 역은 이영환, 쏘냐의 할머니 마리아 역은 정은희, 유모 마리냐 역은 박경단이 맡았다. 몰락한 지주 쩰레긴 역을 맡은 김상오는 눈에 띄는 배우였는데, 연출의 의도인지, 배우의 연기력인지는 몰라도 희곡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역인 쩰레긴이 이 무대에서는 제일 눈에 띄었다. 그는 소냐의 집에 얹혀사는 몰락한 지주 역을 찰떡처럼 소화해 내었고,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무대 전체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 선에서 오히려 활기를 더하는 방향으로 역을 해냈다. 물론 다른 배우들이 자기 몫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눈에 띌 수 있었겠지만 정말 제대로 된 광대(배우)라는 생각이 드는 배우였다.

 매부의 젊은 새 아내(엘레나)를 사랑하는 늙은 농부 바냐와, 환자의 아내(엘레나)를 사랑하는 의사, 그 의사를 사랑하는 소냐, 그리고 남편에 대한 정절을 지키지만 젊고 매력적인 의사에게 잠깐 마음은 흔들렸던 엘레나만 생각하면 무슨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에 나오는 연인들 이야기 같겠지만 체홉의 ‘바냐 아저씨’는 조금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바냐는 일생을 인텔리인 매부를 존경하고 그의 학문에 이바지하는 보람으로 농부의 길을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매부의 젊고 아름다운 새 아내는 그에게 자신의 삶을 반추할 기회를 준다. 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던 것일까. 왜 살았던 것일까. 그는 평소 하던 일도 때려치우고 급작스럽게 그의 삶에 던져진 화두를 끌어안는다.
소냐와 바냐.<광주배우협회 제공>
 
▲“어떻게 해요, 살아야죠! 다시…”

 그 와중에 교수는 땅을 팔겠다고 한다. 늙은 장모나, 나이 들어 농사짓는 것 말고는 할 줄 모르는 바냐, 그리고 소냐는 안중에도 없이 자기 일신을 위하여 땅을 팔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 격분한 바냐는 매부에게 총을 쏘고, 다행히 목숨을 건진 교수는 엘레나와 함께 다시 도시로 떠난다. 남은 바냐와 소냐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물론 그대로다. 다시다. 그들은 다시 예전의 생활로 돌아갈 것이다. 땅을 경작하고 소출을 계산하고. 그렇지만 전에는 몰랐던 괴로움을 가지고 그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교수 일행이 떠나고 엘레나 덕분에 생애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단비를 맞은 바냐가 괴로워할 때 소냐는 말한다. “어떻게 해요, 살아야죠! 바냐 아저씨, 우리 살아요. 길고 긴 수많은 낮과 기나긴 밤들을 살아가요.” 이 대사를 듣는 관객들이, 이 연극을 본 관객들이 이 작품을 어떻게 느끼는가는 각자의 몫이다. 바냐의 삶이 허무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하는 삶이라는 녀석의 끈질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만들어진 이번 광주배우협회의 열세 번째 작품, 체홉의 ‘바냐 아저씨’에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엘레나였다. 물론 엘레나 역은 충분히 잘 만들어졌고, 여러 작품에서 다져진 내공으로 정경아 배우가 손색없이 연기해냈다. 하지만 좀 더 매력적인, 그 어느 누가 봐도 이 여자라면 사랑에 안 빠지는 게 무리겠다 싶은 아우라가 조금 부족했다고 할까. 젊고 아름다운 역이라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인정하며 무대에 보이지 않는 약속을 하며 보는 엘레나 말고 좀 더 눈에 확 띄는 엘레나, 척박한 땅에 핀 한 송이 꽃 같은 엘레나를 바란 건 애초에 내 욕심이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광주배우협회의 다음 작품을 기대한다.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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