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게릴라가 되어 싸우는가
‘정글’에 숨은 인간, 전쟁의 참상

▲ 연극 ‘게릴라 씨어터’.<극단 바람꽃 제공>
 10월 어느 날 나는 한 젊은이들의 연극 무대 시연회에 초대받아 극장 ‘문예정터’를 찾았다. 극단 ‘바람꽃’이 정식 공연을 앞두고, 사람들을 초대해 공연에 대한 소감을 청취하고 조언을 구하는 자리였다. 열정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들이 선택한 극본과 그동안 연습한 결과물을 그냥 밀고 나가도 되는데, 공연을 일주일 남기고 시연회를 하는 것은 용기와 열정이 없이는 하기 힘든 일이다.

 시연회를 통해 만난 극단 ‘바람꽃’의 ‘게릴라 씨어터’는 내게 당혹스러운 감정을 주었다. 연극의 줄거리는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연상시켰고, 연극의 전체적인 톤은 박조열의 희곡 ‘오장군의 발톱’이었는데, 여기에 코미디언 심형래의 ‘영구 없다’가 합쳐진 느낌이었던 것이다. 세세한 디테일들은 일주일 안에 의논을 거쳐 고칠 수 있겠지만 전체적인 방향성과 연극의 톤을 조절하기는 쉽지 않아 보여서 그냥 잘 봤다고 인사치레나 하고 싶었지만, 젊은 연극인들의 반짝이는 눈빛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나오면서 나는 그들의 공연을 크게 기대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당혹스런 시연회, 그리고 무대에

 일주일 후 나는 그들의 무대가 정식으로 올라가는 ‘궁동예술극장’을 찾았다. 무대라는 것은 일주일 만에 완전히, 완벽하게 달라질 수 없다. 애초에 그들이 선택한 오세혁 작가의 ‘게릴라 씨어터’라는 희곡이 가지고 있는 결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의 작품을 어떤 연출가가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연출해내는지, 각 캐릭터를 맡아서 연기해내는 배우가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다른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최근에 나온 영화 ‘조커’가 그 좋은 예일 것이다.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1989년에 나온 잭 니콜슨의 ‘조커’(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와, 2008년 히스 레저의 ‘조커’(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그리고 이번에 나온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토드 필립스 감독의 ‘조커’)가 다 다르다.

 그런데 극단 ‘바람꽃’은 이번 무대를 준비하면서 지정된 연출 없이 공동 연출로 작품을 만들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위험한 시도일 수도 있고, 신선한 모험일 수도 있다. 한 명의 강력한 연출가가 전체적인 방향성을 설정하고 그에 맞게 동선과 구도를 짜고 연기를 요구하는 연극이 아니고, 극에 참여하는 극단원 전원이 의견을 내고 그에 맞추어 작품을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래서 시연회를 가졌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들이 시연회에서 나왔던 관객들의 조언을 경청했다는 것을 본 공연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큰 변화는 없었지만 시연회에서 말이 나왔던 부분들을 수용해서 연극을 고치려고 했다는 것을 알고 작은 감동이 밀려왔다. 이 젊은이들은 진심으로 연극을 사랑하고 있었다. 지방 소도시에서(광주가 광역시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연극판 전체를 놓고 보면 소도시라고 감히 생각한다) 무대를 준비하고 연극 공연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데, 열정을 다해 무대를 준비한 그들이 멋져 보였다.
 
▲ 조언 경청하고 열정 다한 무대

 헤밍웨이의 작품을 거론했으니, ‘게릴라 씨어터’의 줄거리가 대충 연상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헤밍웨이의 소설은 게릴라와 정부군의 전쟁이 주된 내용이지만, ‘게릴라 씨어터’는 제목에 나온 대로 정부군의 추격을 피해 정글에 숨어 사는 게릴라들이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연극을 꾸민다는 것이 기본 이야기다. 여기에 게릴라들을 추격하는 정부군이 나오고, 게릴라들을 도와주고 있지만 삶이 힘들어져 조력자 역할을 포기하려고 하는 민간인(산지기와 그 딸)이 나온다.
연극 ‘게릴라 씨어터’.<극단 바람꽃 제공>|||||

 게릴라들이 민간인을 관객으로 하는 연극을 꾸민다는 것은 남미의 반체제 인사이자 연극인이었던 아우구스또 보알의 실제 체험에서 비롯된 에피소드이다. 남미의 게릴라들처럼 이 연극에 나오는 게릴라들은 문맹에, 가난하고, 독재 정권으로부터 억압받는 이들이다. 이들은 조력자의 입장을 철회하려고 하는 산지기와 그 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연극을 준비한다. 왜 자기들이 게릴라가 되었으며, 왜 정부군에 대항하여 싸우는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보여주는 연극이다. 그 과정에 수색대가 이들을 잡기 위하여 정글에 투입된다. 내용만으로는 헤밍웨이의 소설 못지않은 긴박감이 흐르고, 흡사 장 폴 사르트르의 ‘무덤 없는 주검’이나 ‘더러운 손’같은 희곡을 연상시키지만 이 글자도 모르고 가진 것은 막대기뿐인 순박한 게릴라들이 벌이는 행태는 알레고리극으로 인간과 전쟁의 참상을 드러낸 박조열의 희곡 ‘오장군의 발톱’의 주인공 오장군을 닮았다.

 우화를 바탕으로 하는 알레고리극은 일반 정극과는 연기나 무대의 톤이 달라진다. 대부분 무언가를 풍자하기 위해 사용하는 장치들이므로 웃음을 유발하고 그래서 코미디적인 요소가 강해진다. ‘오장군의 발톱’도 순박한 오장군과 순수한 꽃분이, 말하는 소를 보고 있으면 현실과의 불일치에서 나오는 웃음이 터진다. ‘게릴라 씨어터’도 너무나 순박한 게릴라들과 명색이 정부군일 뿐, 게릴라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수색대가 웃음을 준다. 그런데 극단 ‘바람꽃’은 알레고리극을 정극처럼, 혹은 정극을 알레고리극처럼 만들었고 여기에 코미디언 심형래의 ‘영구 없다’와 같은 분위기마저 지녀버린 것이다.
 
▲ “너무 진지함” 털고 진짜 게릴라 되길…

 게릴라와 정부군의 싸움이지만, 결국 이 정부군이나 게릴라나 다 같은 사람이라는 메시지, 게릴라들이 정글에 숨어서 싸우는 이유에 붙어서 나오는 인간과 자유, 평등에 대한 사색, 게릴라처럼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꿈을 지키고자 투쟁하는 예술인들에 대한 애정, 이런 여러 가지 거대한 메시지에 젊은 연극인들이 짓눌린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메시지를 전하고자 애쓰면 형식이 두드러지면서 오히려 형식미가 파괴된다. 진지함 속에 웃음을 주고 웃음 속에 진지함을 전달해야만 했던 연극이었는데, ‘바람꽃’의 젊은 배우들은 너무 진지했다.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것에 아마도 이 세상이 한 몫 했으리라.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그들이 그 진지함을, 열정과 용기를, 신선한 시도와 위험한 모험을 추구하는 정신을 잃지 않고 영원히 게릴라가 되기를 원한다. 그들이 가진 막대기를 진짜 총으로 바꿔 주기 위해서 나 역시 변방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말로 작은 위로를 전한다.
임유진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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